도봉계곡의 바위글씨(암각문) ‘용주담’이 새겨져 있는 바위앞 폭포 왼쪽에 있는 바위의 수직면을 바라봅니다.
나무가지 사이로 보이는 암벽면에는 必東岩(필동암)이라고 옆으로 새겨진 바위글씨가 보입니다.
<필동암>
필동암 바위글씨의 왼편에는 ‘朴思浩’라는 조그만 글씨가 세로로 새겨있는데 이 필동암을 쓴 사람인지, 아니면 후세에 누군가가 속물근성으로 이름을 새겨 놓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필동암>
‘必東’이라는 말에 담겨있는 뜻을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흔하게 쓰는 사자성어 중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 대륙에 있는 황하강은 만 번을 꺾어 흐르지만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어떠한 일에 곡절은 있더라고 필경은 본뜻대로 나간다.’라는 뜻과 ‘충신의 절개는 꺽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필동암>
만절필동은 중국에서 쓰는 말이지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만절필서(萬折必西)라고 해야 하겠고요.
이 용어를 쓰는 사람을 보면 중국의 모화사상에 푹 빠진 사대주의자로 보여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필동암은 그 ‘만절필동’에서 필동을 가져오고 그 뒤에다 岩자를 붙인 것으로 보이구요.
<필동암>
이 만절필동이란 말은 우암 송시열 선생과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인 1684년(숙종 10)에 가평 군수 이제두(李齊杜)와 허격(許格), 백해명(白海明) 등은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가 베푼 은혜와 청(淸)나라에게 받은 수모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가평군 하면 대보리에 있는 조종암이라는 바위에 몇 개의 바위글씨를 새겼 놓았는데, 그 중에 선조가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에 고마움을 표한 글로서 “일만 번 꺽여도 반드시 동녘으로 흐르고,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주어 나라를 찾아주었다.”는 뜻으로 쓴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藩邦)’도 새겨져 있답니다.
우암 선생이 이 선조의 친필과 명나라 의종에게 받은 ‘思無邪(사무사)’라는 글씨를 이제두에게 보내어 바위에 새기도록 했다고 합니다.
대보리라는 동네이름도 이 명나라에게 크게 보답하자는 뜻으로 붙인 이름으로 보이고요
<필동암>
또한 우암선생의 만년에 사용하던 ‘화양노부’라는 호의 유래가 되는 충청도의 화양계곡에는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제자인 권상하가 숙종30년(1704)에 묘우를 지었는데, ‘만절필동’의 첫 자와 마지막 자를 떼내어 만동묘(萬東墓)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 만동묘에서는 우암 선생의 뜻에 따라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의 신종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제사를 지냈는데 후에는 우암 선생을 따르던 노론들의 소굴이 되어 당쟁의 근원이 되었고, 또한 이를 운용하는 비용 염출로 인해 민폐가 심해지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헐어버리고, 신주와 편액(扁額) 등은 서울 대보단(大報壇)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겼답니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1874년(고종 11년)에 다시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도 유생들이 모여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므로 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하였다고요.
<필동암>
선조의 입장에서 보면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에게 고마움을 표시할 수 있겠으나, 우암 선생은 지독한 모화사상을 갖고 있던 사대주의자로 지금까지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데, 일부에서는 병자호란으로 지독한 수모를 당하고 난 뒤에 반발심으로 명나라를 숭상했던 것이라고 이해하는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고 합니다.
<필동암>
필동암을 둘러봅니다.
필동암 왼쪽에 있는 ‘박사호(朴思浩)’라는 사람이 이 글을 썼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한번 검색을 해보니 한 사람이 나오네요.
<박사호>
박사호((朴思浩)는 1828년(순조 28)에 冬至正使 洪起燮을 따라 청나라의 북경에 다녀오면서 燕行日記를 저술한 사람으로 朴思浩의 생몰년이나 관력은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자신의 직함을 前郎廳이라 하였고 正使 洪起燮(1776∼1831)의 軍官으로 차출되기 전에 東營幕府에서 근무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江原道觀察使의 裨將을 지낸 경력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하는데 이 글씨와는 상관이 없는 듯 합니다.
<폭포>
이 글씨를 쓴 사람은 아마도 우암 선생을 따르는 노론의 후학이거나 문인으로 우암 선생을 모신 서원이 있는 이 도봉계곡에 선생과 깊은 관련이 있는 '만절필동'에서 필동을 따서 필동암이라고 새겨놓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니면 이 도봉계곡의 물이 동쪽으로 흐르고 있으니까 이를 황하에 견주어 조그만 폭포가 있고 경관이 좋은 물가에 있는 바위라고 ‘필동암’을 새겨 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째든 이 필동암이라는 바위글씨는 중국을 대국으로 모시던 우리 선조들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아 좀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듭니다.
<필동암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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