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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글씨

바위글씨(4) 염락정파수사진원-도봉산

도봉산입구의 서원마을에 있는 도봉서원 앞 계곡의 바위글씨를 찾아봅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제월광풍~" 글씨와 권상하 선생의 "무우대" 글씨가 새겨진 바위의 바로 위쪽에는 그보다는 작은 바위가 솟아 올라있습니다.

<염락정파 수사진원>
송시열, 권상하 선생의 바위글씨는 개울로 내려서야 보이지만 이 바위글씨는 등산로 옆 화단으로 올라서면 바로 위의 그림에 있는 바위가 있고그 위에세로방향으로 새겨진 두줄의바위글씨 "염락정파 수사진원(濂洛正派 泗眞源)"을볼 수 가 있습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화단에는화초가 자라고 있고보이지 않지만 많은야생화들이 잠자고 있으니그들이 다치지 않게주의를부탁드리고요.
행서로 깔끔하게 내려쓴 두줄의 글씨 옆에는 조금만 글씨가 있는데 좀 알아 보기가 어려워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펴보니 "춘옹서(春翁書)"로 보입니다.
"춘옹"은 동춘당 송준길이라는 유학자의"호" 라고 합니다.
<염락정파 수사진원>
좀더 잘 보기 위해 개울로 내려갑니다만 위에서 보는 것이 더 잘 보이는것 같습니다.
동춘당 송준길(선조39년~현종13년, 1606~1672)선생을 검색, 한국의 인물에서 요약을 해봅니다.
어려서부터 이이(李珥)를 사숙하였고 김장생의 문하생이 되어 16230년 부터 효종이 즉위할 때 까지 여러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1633년 잠간 동목교관직에나갔다가 장인의 죽음으로 사퇴함.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이 이조판서가 되면서 송시열과 같이 발탁되어 관계에 나갔고,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반정공신들을탄핵하여 몰락시켰으나 그 중의 하나인 김자점이 효종의 반청정책을 청나라에 밀고, 벼슬을 물러남.
그뒤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사퇴를 하다가 효종9년(1658)에 대사헌, 이조참판, 벙조판서을 거쳐 1650년에지중추원사, 우참찬 등으로 송시열과 국정에 참여하다가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고 이후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남인들의 상소로 계속 사퇴를 하였음.
1673년 1월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1675년 남인들의 상소로 삭탈당하였다가 1680년 서인들이 집권을 하자 관작이 복구되었음.
송시열과 동종(同宗)이면서 학문성향을 같이한 성리학자로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고, 특히 예학에 밝아 일찍이 김장생이 예학의 종장이 될것을 예언하기도 하였고,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음.
1681년 숭현서원에 제향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영조32년(1756)에 문묘에 제항됨.
저서로는'어록해(語錄解)', '동춘당집'이 있으며, 글씨로는 부산의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 남양의 윤계순절비문(尹啓殉節碑文)이 있음.
대충 요약을 해보니 학문도 높고 나름대로 경륜을 갖춘 학자인데당쟁의 시대에 살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모양입니다.
<염락정파 수사진원>
염락정파 수사진원(濂洛正派 泗眞源)에 대해 알아봅니다.
염락(濂洛)은 염계(濂溪)와 낙양(洛陽)으로, 송유학(宋儒學)을 일으킨 주돈이와 그 제자 정호, 정이 형제를 배출한 곳이며, 수사(洙사)는 공자의 구기(舊基:예전에 살았던 곳)인 권리(闕里)라는 동네가 있던 곳이랍니다.
따라서 염락과 수사는 송학(宋學)과 선진유학의 대명사라네요.
이 "염락정파 수사진원"은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도학정치(道學政治)의 구현을 위하여 노력한 조광조를 흠모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설명이 좀 어려운데 "염락정파 수사진원"에 대해 조금 더 알아봅니다.
염락은 염계(濂溪) 땅의 주돈이(周敦?)와 낙양 땅의 정호(程顥), 정이(?)형제의 계통을 이은 학문을 말하는 것으로 곧 성리학을 뜻한다고 합니다. 또한 염락관민(濂洛關?)이라는 말도쓰이는데 이는앞의 염락에 더하여 관중(關中)땅의 장재(張載), 민중(?中)땅의 주희(朱熹)까지를 포함한 것으로, 염락정파(濂洛正派)는 송대 성리학의 바른물결을 뜻한다고 합니다.
수사는 중국 산동성 곡부현의 수수(洙水)와 그 지류인 사수(泗水)를 말하는데 그 곳에서 공자가 제자에게 학문을 가르쳤으므로 공자문하를 뜻하는 것으로, 수사진원(泗眞)은공자사상의 참 근원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즉 염락정파 수사진원은 성리학의 바른 물결과 공자사상의 참 근원 이라는 말로 송준길 선생이 정암 조광조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흠모하여 세겨 놓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 줄로 간단하게 정리하면
"염락정파"는 "송대 성리학의 바른 물결을 의미하며, 수사진원은 공자사상의 참 근원"이라는 뜻으로 공자와성리학의 학문과 사상을 숭상한다는 얘기인가 봅니다.
<염락정파 수사진원>
이 글씨의 크기는 118 x 89 Cm라고 합니다.
선생과송시열은같은 시대를 살며 같은 학풍과 사상을 갖고 있었으며'정암 조광조' 선생을 같이 흠모하고, 또 한 이 곳 도봉계곡의 이웃하여 앉아 있는 바위에글씨도새겨져 있어어떤 의미를 부여해 봅니다.
도봉산에 오르 내리며 '조광조'선생이 모셔진 도봉서원을 지나칠 때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수구세력의 반대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한조광조 선생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생각하곤 했는데이제는 저승에서 두 분이 마주 앉아 실패한 개혁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현실 정치를 하면서 P-D-C-A Cycle을 적용하지 않아 실패했을까요?
<염락정파 수사진원>
눈이 내린 어느 겨울 날, 도봉산에 올랐다가내려오면서눈이 얇게 덮여 있는 것을 담았습니다.
<바위글씨 "염락정파 수사진원"의 위치>
도봉산 개울에 있는 바위글씨 "염락정파 수사진원(濂洛正派 泗眞源)"를 돌아보았습니다.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