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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글씨

바위글씨(2) 제월광풍갱별전과 도봉서원-도봉산

도봉동 입구에 있는 바위글씨(암각문) "도봉동문"을 지나 길을 따라 오르면 쌍줄기약수를 지나서 우측에 도봉서원이 보입니다.
그 왼쪽에 있는 개울로 내려가 바위를 더듬어 보면 "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 라는 글씨와 그 아래에 조그만 글씨로 "華陽老夫書"이라는 암각문을 볼 수가 있는데 이 글씨는 특이하게 옆으로 글자를 눕혀서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왼편에는 "무우대"라는 글씨가 세로로 새겨져 있는데 이것을 다음에 살펴보고요.
"세계속의 한국예절"이란 책에서 이 바위글씨에 대한 내력을 찾아봅니다.
<무우대와 제월광풍갱별전 요장현송답잔원(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
우암 송시열 선생은 현종 9년(1668) 10월, 62세 때에 도봉서원에 와서 정암 선생을 추모하며 사당을 참배하였는데, 우암 선생이 도봉서원에 이르자 많은 선비와 유지들이 모여와서 강의를 요청하므로 며칠을 머물며 학문을 강론하였고, 또한 재학생들의 요청으로 붓을 들어 도봉산입구에 새겨놓은 “道峰洞門”과 또한 “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라는 글씨를 썼주었고 이 14자의 글씨는 서원 앞 계곡의 바위에 깊이 새겼답니다.
<무우대와 제월광풍갱별전 요장현송답잔원(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
14자의 시구는 본래 주자가 주자가 白鹿洞書院講會(백록동서원강회)에서 학생들에게 오르지 유학에 전념하여 도덕적 품성을 기르고, 절대로 출세를 위한 과거공부나 현실을 도피하는 망상을 하지 말도록 권고한 두편의 시 가운데 한 구절씩을 발췌한 것이랍니다.
<무우대와 제월광풍갱별전 요장현송답잔원(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
즉 우암 선생은 이곳의 유생들에게 "도봉서원의 학풍은 백록동서원의 학규를 본받아 정의를 지키고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도덕을 밝히고 공로를 계산하지 않은 진리의 전당으로 길이 발전해야 된다"라는 권한 것인데 그 두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제월광풍갱별전 요장현송답잔원(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
<백록강회자복장운(白鹿講會次卜丈韻)>
집과 담장터에 잡초가 우거진 지 그 몇 해인가?
오직 찬노을만 있어 골짜기 샘물 지켰다네.
집을 지으니 다행히 옛 경관을 추상하거니와
서원의 명칭은 아직 유서 깊은 전통을 이을 허락을 받지 못해라.
푸른 구름, 하얀 돌은 애오라지 같은 취향인데
비가 개고 달이 올라 시원한 바람이 다시금 특별히 이어받았도다.
진귀하고 소중한 벗이 많이 있는 가운데 무한한 즐거움이 있나니
이곳의 학생들은출세의 가도를 달리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고민하지 말라.
여기에서 "비가 개고 달이 올라 시원한 바람이 다시금 특별이 이어 받았도다."라는 귀절의 "제월광풍갱별전-霽月光風更別傳"의 한 구와,

<그림을 세워본 제월광풍갱별전 요장현송답잔원(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
<차운음사십숙부백록지작(次韻四十叔父白鹿之作)>
띠풀을 베어 집을 짓고 옛날 어진 이를 생각하니
천년 전에 남긴 자취 아직도 완연하구나
짐짓 추녀 끝에 낸 창문이 푸른빛을 끌어들이거니
애오라지 거문고를 치며 노래하여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화답하네
이곳에 학생들이 뜻을 두고 모름지기 학문에 정진하면
늙은 선생은 가르칠 능력이 없어 단지 졸기만 하리로다.
많은 벗이 모여 있는 가운데 도덕학문이 즐겁나니
공허한 논리를 말하지 말고, 신선도 추구하지 말아라.
"애오라지 거문고를 치며 노래하여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화답하네"라는 귀절의 "요장현송답잔원(聊將絃誦答潺湲)"의 한 구를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송자사상선양사업회'에서 세워놓은 "도봉동문"의 안내판에 보며는 이 14자의 싯귀는 "우암 선생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돌방의 암혈>
제월광풍갱별전~ 바위글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커다란 돌에 구멍을 파놓은 것이 있는데 "돌방의 암혈"이라고 하네요.
즉 이곳 큰 돌에 구멍을 뚤어 여기에 반향되는 물소리를 즐겼다고 합니다.
'바위글씨전'의 도록에 보며는 작은 글씨로 된 "華陽老夫書"의 화양노부는 우암 송시열을 호칭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으며 또한 이 글씨는 393Cm x 110Cm의 크기랍니다.
개울에서 나와 오른편에 있는 도봉서원을 둘러봅니다.

<홍살문>
도봉서원의 입구에는 홍살문이 높이 서있고 그 앞에는 "대소인하마"라는 하마비가 있습니다.
말 대신에 차를 대입하면 "대소인하차"를 대입하면 고위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이 앞에서는 차에서 내려 보행으로 경의를 표하여야 겟지요.
그런데 오히려 이 앞에 주차해 놓은 차들이 많고 또한 홍살문 옆에서는 술판을 벌리고 있는 패들도 눈에 뜨입니다.
이 차들과 사람들을 피해 사진을 담다보니 사진도 이상하게 나왔고요.


<도봉서원>
도봉서원은 선조 6년 양주목사 남언경이 도봉산 입구에 있는 정암 조광조 선생 유적을 더듬고, 마을 선비들의 자문을 받아 선생의 사후 55년 만에 사우(祠宇)와 서원을 설립하였고 그 다음해에 사액을 받은 사액서원이랍니다.
정암 선생은 한양 출신으로 소년시절부터 이곳을 자주 왕래하며 심신을 단련하였으며, 청년기에는 제자들과 함께 여기서 예의도덕과 학문을 논하였고, 출사해서도 틈틈이 찾아오곤 했다는데 중종 14년 남곤 등 훈구파에 의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3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치었다고 합니다
서원의 창건 20년 후,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소실되었으며, 16년 후인 선조 41년(1608)에 재건하였고 그 후 광해군 2년(1610)에 정암 선생을 문묘에 종사하였다고요.


<도봉서원 좌측면>
그러나 송시열 선생은 장희빈 소생의 왕자를 세자로 책봉에 반대하여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가 숙종15년 6월 8알 오전에 남원에서 사약을 받고 83년의 생을 마치었지만 7년 뒤인 숙종 22년(1696)에 선생의 위패를 이 도봉서원에 정암 선생과 함께 병향(위패를 나란히 모심)하였답니다


<도봉서원>
담너머로 도봉서원의 내부를 슬쩍 살펴봅니다.
경종 3년(1723)에 김범갑과 최탁 등이 우암 선생을 도봉서원에 합향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상소를 하여 선생의 위패를 출향시켰는데, 계속되는 유배에도 불구하고 경향각지의 유생들이 복향을 상소하였고, 영조임금은 원년(1726)에 선생의 위패를 복향 시키고, 또한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었으며 복향을 상소하다 귀양간 유생들을 사면 시킨 반면에 김범갑과 최탁을 무고죄로 귀양보냈다고 합니다.
이어 영조임금은 32년(1756) 2월에 우암 선생을 문묘에 종사시키도록 하였고 51년 (1775)에는 친필로 사액하니 도봉서원은 양현(兩賢)을 모두 문묘에 종사한 어필사액서원이 되어 크게 번창하였답니다.
<성균박사 노은 남궁복 선생기념비>
고종 9년(1871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3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유서 깊은 도봉서원도 철패됨에 따라 정암 선생은 용인의 심곡서원에, 우암 선생은 여주의 대로사(大老祠)에 배향하였다가 1970년에 양주향교의 전교인 남궁복씨의 발의로 도봉서원재건위원회를 창립하여 경내에 사우를 다시 세우고 정암 및 우암 선생의 위판을 병향하여 춘추제향을 받들어 오고 있답니다.
그런데 좀 아쉬운 것은 기록에 보면 이 도봉서원은 양현을 위패를 모신 사우(祀宇)와 유생들의 숙소인 서재와 동재, 그리고 서원과 부속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우만 달랑 복원되어 있는데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참고로 이 도봉산의 건너편 수락산계곡의 장암동에는 우암 선생과 정적 관계였던 실학파 서계 박세당 선생이 당쟁에 협오를 느껴 이곳에 유거하던 고택과 후진을 가르키던 낡은 궤산정 그리고 김시습의 절개를 기리어 세웠던 청풍정 터 등의 유적과 그 분의 아들로 인현왕후의 패출을 반대하다 죽음을 맞은 서계 선생의 차남 박태보를 모시는 "노강서원"이 자리를 하고 있는데 이 노강서원은 사우, 서원과 동재 서재가 모두 갖춰있습니다.
하기야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패츨령이 내렸을 때도 남아있던 서원중의 하나라 그런지 몰라도요.
도봉서원 옆에는 검은색의 기념비가 하나 서있는데 "성균박사노은남궁복선생기념비"라고 되어 있고 측면에는 작은 글씨로 그의 치적이 새겨져 있는데 1970년에 도봉서원재건위원회를 발의한 남궁복 선생의 기념비인로 보입니다.
비의 측면에 치적이 새겨져 있지만 알아보기가 매우 힘들어 보다가 포기를 하였는데 이왕이면 이 옆에 안내판을 하나 세웠으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암각문의 위치>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