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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돌이

강화도 사적지와 순교성지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참 동안 블로그를 관리하지 못하였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2007년 8월 27일 강화도의 사적지와 순교성지를 둘러본 것 부터 시작할까 합니다.
<역사관>
8월도 느지막한 날 강화도를 찾아봅니다.
오늘은 산을 싫어하는 집사람과 동행을 하다 보니 등산과는 관계없이 강화도의 사적지와 성지를 둘러보기로 하고 그냥 평상복의 간편차림으로 출발을 합니다.
새로 난 강화대교를 건너 U-Turn, 역사관을 찾아갑니다.
주차를 하고 역사관 정문을 들어서니 수많은 비석들이 도열하고 우리를 반겨줍니다.


<강화비석군>
강화비석군이라는 안내문이 서 있는데 조선시대 이곳에서 선정을 베푼 관리들의 불망비, 선정비와 자연보호의 일환으로 세운 금표, 그리고 인조14년 청나라와 싸워 전사한 삼충신(강홍업, 구원일, 황선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삼충사적비 등 67개의 비석을 1965년 강화대교의 착공시 그 주변에 있던 것을 다른 곳에 옮겼다가 비석군의 정비사업으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역사관에는 선사시대부터 구한말까지의 역사적인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교수의 인솔하에 역사탐방을 온 대학생들이 전시관을 차지하고 있어 소란스럽습니다.
학생들 때문에 전시관이 너무 복잡하여 강화동종 등 몇 가지 유물을 카메라에 담고는 역사관 밖으로 나섭니다.


<이보정>
역사관 우측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갑곶돈대로 올라갑니다.
서울의 주요 방어기지인 동시에 외적의 침입 시 황실 피난처였던 강화도는 병자호란 이후에 외적의 침공에 대비하여 주요 장소에 성곽과 진,, 돈 등의 군사시설을 설치하였고 그 중의 하나가 이 갑곶 돈대로 1977년 복원하였는데 포대와 성곽 그리고 이보정이라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구 강화대교>
이보정에 올라서니 주변 해안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군 요충지다웠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구 강화대교의 전경도 눈에 들어옵니다.


<갑곶순교성지>
역사관을 나와 바로 위에 있는 갑곶순교성지로 향합니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유입통로는 육로였으나 이의 경비와 기찰이 심해지자 강화도와 황해도 연안의 뱃길이 중요한 신앙 유입통로가 되었고 김대건 신부는 선교사의 입국을 위한 마포-갑곶-연평도-백령도를 거쳐 해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에서 관원들에게 잡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강화도는 19세기 말 동. 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을 빚었고 1866(병인)부터 시작된 박해로 수많은 천주교 신자가 순교를 하였으며, 1861년 신미양요 때에는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등을 이곳 갑곶나루, 일명 막구터에서 목을 베이어 말뚝에 효수하여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한 곳으로 천주교에서 그 자리를 매입하여 순교성지로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갑곶성지>
늦은 여름날 한 낮의 조용한 성지에서 십자가의 길을 따라 안식구와 같이 기도를 드리니 있으니 마음이 참 평화롭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순교자 묘소와 야외제대와 주변 풍광을 둘러보고는 성지를 나섭니다.


<고려궁지 승평문>
강화시내로 들어가 고려궁지를 찾아봅니다.
고려궁지는 고려 고종이 대몽 항쟁을 하기 위해 1232년에 도읍을 강화로 옮기면서 지은 궁궐로서 원종11(1270)에 몽고와 화의를 하고 개성으로 되돌아 간 뒤에 화재로 소실 되었으며, 그 후 조선시대에 고려궁터 자리에 행궁과 강화유수부 건물을 세웠지만 장녕전, 외규장각 등 많은 건물이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에 의해 불태워졌다고 합니다.


<외규장각>
그런데 이 나쁜 프랑스 놈들은 그때 홈쳐간 많은 국보급 서적을 미끼로 경부고속철도 공사만 꿀꺽하고 아직까지 서적은 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국제적 사기나 치고 다니는 프랑스의 대통령이라는 놈은 죽어 마땅한 나쁜 놈이지만 그 사기에 걸려든 한국의 대통령 각하는?에궁~ 생각을 말아야지……


<강화부종각>
넓고 높은 돌계단 위에 정문인 승평문이 위엄을 갖추고 있으며 안으로 들어서니 동헌 건물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 깔끔하게 가꾸어 놓은 넓은 잔디밭 건너 북쪽에는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보이는 외규장각이 외로이 앉아 있고, 서쪽으로는 동종을 보관하고 있는 강화부종각, 그리고 남쪽에는 강화유수부의 이방청이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진무영성지>
고려궁지 바로 아래에는 천주교 강화교회가 있는데 그 경내에 진무영성지가 있습니다.
진무영1700(숙종26)에 해상 방어를 위해 설치된 군영으로 1866년 병인박해로 성직자 12명과 신자 10000여명이 처형되자 최인서, 장치선 등 4인은 생존 성직자인 리델 신부를 탈출시키고 남은 교우들을 구출하고 선교활동을 하였다고 1868년 5월 22 처형을 당한 곳이라고 합니다.


<강화지석묘>
진무영성지를 나와 하점면 부근리에 위치한 강화 지석묘를 찾아갑니다.
강화 지석묘의 이정표를 따라 가는데 중간에 사라지고,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오고 하면서 겨우 찾아갑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을 했다는데도 운전자가 쉽게 찾아 가지 못하는 이정표가 한심합니다.
이 고인돌은 북방식으로 분류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인돌 무덤이라고 합니다.
흙으로 바닥을 수십층 다진 뒤 고인돌을 자우에 세우고 한쪽끝에 판석을 막아 무덥을 만들었으나 두 끝의 마감돌이 없어져 석실이 긴 통로처럼 되어 있고, 덮개돌은 길이 6.6m, 너비 5.2m, 두께 1.2m에 전체 높이가 2,6m라고 합니다.
이리저리 잘 생긴(?) 모습을 둘러보고 있는데 막 도착한 일본인 단체 관광객 한 떼가 몰려오고 있어 서둘러 사진을 담습니다.
잔디로 넓게 조성해 놓았지만 고인돌 서너 기만 여기 저기에 자리하고 있어 좀 그렇습니다.
안내판이나 이정표를 보면 지석묘라고 되어 있는데 고인돌이라는 좋은 우리나라 이름이 있는데 굳이 한자로 표시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용진진-좌강돈대>
다시 강화 시내를 거쳐 갑곶돈대 남쪽의 사적지를 찾아갑니다.
한참을 내려가니 길가 우측에 둥근 성곽과 날렵한 누각이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차를 세우고 둘러보니 용진진이랍니다.
용진진은 효종 7(1656)에 쌓은 것으로 100여명의 병력과 포 4문 그리고 28개소의 총좌 시설물이 있었고 여기서 가리산, 좌강, 용당 등 세 곳의 돈대를 관리였는데, 석축 대부분이 없어지고 홍예문 두 곳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문루와 좌강돈대를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화도돈대>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가니 왼쪽 바닷가로 화도돈대가 나와 차를 세우고 올라가봅니다.
문화재공사안내판이 맞이하는데 화도돈대 보수공사로 인하여 관람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라고 환영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쉬는 참인지 일하는 분들이 일 손을 걷고 한 곳으로 모이고 있는데, 그 곳에는 노출이 심한원색 옷을 입은 다방아가씨가 커피 출장을 나와 있습니다.
재미있어 사진을 한 컷 담고 공사현장을 둘러보니 아기자기하게 복원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석축에 맞춰서 새로 석축을 올리고 있는데 기존 석축의 높낮이 면에 새 석재가 딱 물리도록 새 석재의 아래 부분을 깎아 설치하는 Detail이 눈에 들어오고요.


<광성보-안해루>
남쪽으로 계속 내려와 광성보에 도착합니다.
광성보는 조선 효종 9(1658)에 설치한 진지로 숙종 5(1679)에 이 보에 딸린 화도돈, 오두돈, 광성돈을 함께 축조하였고 신미양요 때(1871) 미국 군대와 48시간에 걸쳐 사투를 벌인 격전의 현장으로 이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전전비와 350여명의 순국 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을 1977년에 정비하였다고 합니다.


<광성돈대>
차를 주차시키고 내려서니 위풍당당한 안해루가 우리를 맞아주며 그 북쪽으로 붙여 구축한 광성돈대로 들어서니 1977년에 복원했다는 포좌와 포 3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쌍충비>
광성돈대를 나와 남쪽 성곽길을 따라 가니 상충비와 무명용사비가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쌍충비는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어재연 와 59명의 순절비로 1기는 광성파수순절비이며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여재순의 순절비로 모두 1873년에 건립되었고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 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충절을 추모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미순의총>
쌍충비가 있는 곳의 서쪽 언덕아래 쪽에는 신미순의총이 있는데 신미양요 때 전사하였으나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군졸 51인을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손돌목돈대>
숙연한 마음으로 신미순의총을 둘러보고 남쪽으로 가다 보면 서쪽으로 난 샛길에 손돌목돈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손돌목 돈대는 숙종 때 축조된 돈대로 중앙에 3칸의 무기고와 포좌 3개소가 있었으며 신미양요 때 미 해군과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라고 합니다.


<광성포대>
손돌목 포대를 내려와 아래쪽으로 용두돈대로 가는 중간에 광성포대의 안내문이 있습니다.
이 포대는 숙종 때 강화도 해안수비를 위해 설치된 시설의 하나로 손돌목 주변 3곳에 설치되었으며 각각 9, 4, 3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었는데 규모가 큰 중앙포대는 길이가 80m의 규모이며1875년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회세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파괴되었던 것을 2004년에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용두돈대>
용두돈대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천연 요새로서 숙종 5(1679)에 축조하였으며 병인, 신미양요 때 치열한 표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라고 합니다.


<용두돈대 포와 기념비>
1977년 성벽을 복원하면서 전적지 정화기념비를 세웠는데 전면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글씨이며 후면은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썻다고 합니다.


<손돌목 물살>
강화도의 광성보와 김포의 덕포진 사이에 있는 해협을 손돌목이라고 하는데 위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물살이 대단합니다.
인조 5(1627) 후금의 공격으로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을 할 때 손돌이라는 사공이 뱃길을 안내했는데 점점 물살이 높은 곳으로만 배를 몰자 인조가 손돌을 의심하여 손돌을 죽였다고 합니다.
손돌은 죽기전에 물살에 바가지를 띄워 그 뒤만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하였고 그 말대로 배를 몰아 강화도에 도착한 인조는 자기가 의심이 많아 손들을 죽인 것을 깨닫고 장사를 잘 지내라고 하였고 손돌은 덕포진에 묻혔다고 합니다.


<초지진>
광성보를 나와 남쪽으로 덕진진으로 가는데 한참을 가도 나오지 않습니다.
고갯마루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여 바닷가로 가야 하는 것을 깜빡 놓치고 말았나 봅니다.
초지진에 도착합니다.
초지진은 조선 효종7(1656)에 구축하였으며 고종 3(1866)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의 극동함대, 그리고 고종12(1875) 8월에 침공한 일본의 운양호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로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기에 호국정신의 교육장으로 1973년 성곽을 보수하였는데 아직도 그 때의 포탄 흔적이 노송과 성벽에 남아있습니다.


<초지대교>
오늘 강화도의 많은 사적지 가운데 몇 군대를 둘러보고 나니 막강한 신식무기로 무장한 외세의 침략에 맞서 화살 나부랭이로 저항하며 목숨으로 나라를 지켰던 선인들을 흔적에 마음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아울러 허약한 조선을 핍박하게 했던 원인의 하나이며 그 신식문물의 일환이었던 천주교 때문에 목숨을 앗긴 수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순교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신앙심 때문에…?
이 두 가지가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원인은 한가지로 귀착됩니다.
권력가들의 폭정에 얼마나 살기가 어려웠으면 목숨을 버리면서도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였던 백성들
정권유지와 사리사욕에만 푹 빠져 당쟁, 권모술수, 세도정치에 의한 왕권의 약화, 대원군의 폭정, 고종의 무능, 명성왕후의 집안다툼, 그에 빌붙어 권력을 탐하였던 탐관오리들
이 들의 폭정과 무능함 때문에 막강한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쳐 들어온 외세에 무모하리만큼 끝내 물러서지 않고 칼과 화살로 맞서서 몰살을 당한 불쌍하지만 자랑스러운 조선군인들
답답한 마음을 생선회나 한 점 하면서 풀어볼까 하고 초지진 회센터로 가보니 그 날이 바로 한 달에 두 번 있는 전체 휴무일이라고 합니다.
좀 아쉬워하는 집사람을 달래어 차를 돌려 시원하게 바다에 걸쳐 있는 초지대교를 건너 서울로 돌아옵니다.
한발물러 세상보기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