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입구에서 도착하여 주차장으로 들어서는데 주변 모습이 내 머리속에 있던 것과는 달리 아주 낯섭니다.
하기야 13년 만에 와보는 것이니 그렇겠지만 주변의 주차장과 위락시설, 그리고 조경이 현대적으로 잘 되어 있어 조용한 절 맛을 잃어 버린게 하는 마음에 내심으로는 못 마땅합니다.
<일주문>
매표소를 지나서 우측으로 굽은 넓은 흙길을 따라가니 일주문이 나오는데, 일주문의 안팎이 탁 트여 있고 길 양쪽으로는 은행나무 가로수가 푸른 그늘은 만들어 찾아오는 이의 눈과 마음을 시원하게 해줍니다.
요즈음 이름이 있는 절은 물론 조그만 암자의 진입로도 아스콘 포장이나 하다못해 조악한 콘크리트 포장이라도 해놓아 찾는 이들을 짜증나게 하는데, 여기는 부드러운 흙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주차장에서 언짢았던 마음이 저절로 풀리게 합니다.
<보물 제 255호 당간지주>
일주문을 지나 부드러운 흙길을 밟으며 약간 굽어진 길을 따라가니 왼쪽으로 잘 생긴 당간지주 한 쌍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이 당간지주는 보물 제255호로 부석사의 창건시기인 7세기의 통일신라 때에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높이가 4.28m이며 지주 사이에는 있는 간대석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천왕문>
길을 계속 따라 올라 가니 덩굴풀에 덮여 있는 높은 석단위에 천왕문이 자리를 하고 있고 돌을 다듬어 만들어 놓은 계단이 천왕문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석단, 돌계단 그리고 천왕문이 주변의 풀, 나무와 잘 어우러지고 있고 있습니다.
<박석 길>
천왕문을 지나니 자연석으로 박석을 깔아 놓은 길이 그 앞에 있는 또 다른 돌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매표소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은 직선으로 되어 있지 않고 약간씩 굽어 있어 지루하지 않도록 되어 있고, 또한 천왕문이 있는 곳에 석단을 쌓았고 또 이곳에 계단을 두어 높이에도 변화를 주었는데 아마도 있는 그대로 가람 배치를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동탑> <서탑>
이단으로 된 계단을 올라서니 좌, 우측에 아주 귀여운 조그만 삼층석탑이 한 기씩 서 있습니다.
안내문에는 통일신라 후기 3층 석탑으로 쌍탑이며 동탑이 3.6m, 서탑이 3.77m이고 상륜부는 없어진 것을 뒤에 보충하였다고 합니다.
<불사리탑 이건비>
그런데 서탑 옆에 석비가 하나 있어 읽어보니 이 ‘불사리탑이건비’라고 되어 있고 그 아래에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알아보기 힘들지만 눈에 힘을 주고 읽어봅니다.
<부석사 동방 반리허(半理許)에 신라사지가 있어 석상과 파탑 2기가 전래하고 있었다. 금년 8월에 이 삼층쌍탑을 본사 범종각 남 동서 이건 하였는데 그 중 서탑에는 전북 익상 오층석탑으로부터 석존사리 5과를 분안하였다. 석탑이건과 사리봉안에 관여한 사내 대중과 향도香徒는 다음과 같다.>
그 뒷면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이 분명하여 살펴보지 않았는데 여기에 ‘금년’이라고 표기된 년도를 확인하지 않았네요.
하지만 이 이건비를 보지 않고 안내문만 보았다면 이 귀여운 삼층석탑이 부석사의 탑이라고 오해 할 뻔 했습니다.
<범종루>
쌍탑을 지나면 ‘봉황산 부석사’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웅장한 건물이 객을 맞이합니다.
돌계단으로 연결된 석단에 아름들이 기둥이 누각을 받들고 있는 정면 세 칸짜, 측면 네 칸의 2층 건물인데 부석사의 중문에 해당하는 건물로 입구쪽에서 보면 팔작지붕이고 반대쪽에서 보면 맞배지붕의 독특한 건축물인데 위용이 대단합니다.
<종각>
매표소 옆에 서있는 안내판에는 이 건물이 ‘범종루’라고 되어 있는데 막상 위로 올라가 보니 범종은 보이지 않고 목어와 법고가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범종은 이 누각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위 그림의 종각에 걸려 있었습니다.
<보장각>
보장각입니다.
이 보장각안에는 보물 제 735호인 ‘삼본화엄경 각판’과 국보 제 46호인 ‘조사당벽화’ 등 귀중한 문화재 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각판은 현재 전해지는 유일한 거란족계열의 각판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하며, 조사당벽화는 조사당의 벽면에 있던 6점의 벽화로서 호법신인 범천, 제석천과 이들에게 통제를 받고 있는 사천왕상을 그린 것인데 일제강점기에 벽체에서 분리하여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1980년에 신축한 보장각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보장각의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벽체에서 분리했다는 것을 보면 이것도 일본넘들이 강탈하려고 하였던 것은 아닌지?
좀 아쉬웠던 것은 보장각 안의 문화재들은 사진촬영이 금지 되어 있었습니다.
<장경각>
장경각입니다.
벌도의 설명이 없지만 이름으로 봐서는 대장경을 보관하는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
<안양문>
돌계단을 올라 안양문安養門으로 들어갑니다.
안양문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아래층에는 ‘安養門, 2층 누각에는 浮石寺라는 편액이 걸려있는데 이 안양은 안양정토(安養淨土)의 준말로 ‘극락’과 같은 의미라고 하니 즉 극락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인가 봅니다.
<안양문>
안양문을 올라가는 돌계단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누군가는 절 입구에 있는 대석단과 여기의 두 단을 합하여 상중하의 3단으로 구품연화대를 상징하는 가람배치로 생각된다고 하는데 아는 것이 없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국보 제 17호 석등>
안양문의 돌계단을 올라서니 정면에는 국보18호인 ‘무량수전無量壽殿’이 눈에 들어오고 그 앞에는 국보 17호인 잘 생긴 석등이 하나 서있습니다.
먼저 석등을 둘러봅니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지는데 불을 넣어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위쪽에는 머리장식, 아래쪽에는 받침돌로 구성되어 잇습니다.
사각 받침돌 위에 연꽃을 조각한 아래 받침돌이 위에 놓인 8각의 기둥을 받치고 있으며, 화사석은 불빛이 나오는 네 개의 창과 그 사이에 보살상 네 구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팔각으로 된 지붕 돌의 모서리는 경쾌하게 치받아 올렸는데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 남아 있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국보 제 18호 무량수전>
무량수전입니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라고 어린 시절부터 들어왔던 건축물이지요.
지난번에 왔을 때는 부석이 있는 쪽의 벽면에는 수학여행 왔던 아이들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낙서가 가득했었는데 지금은 그 위에 칠을 다시 했네요.
그래도 자세히 보면 원래의 벽면에 낙서의 흔적이 보이고 있습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본전으로 서방극락세계의 주불인 아미타불을 모신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 양식으로 돌기단 위에 초석을 다듬고 그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입니다.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문구를 몇을 빌려옵니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 들이 마치 그림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무량수전 앞의 전망>
무량수전 앞 에서 바라본 주변 경관입니다.
최순우 선생의 눈으로 본 풍경을 한 꼭지 더 가져옵니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 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다.>
<무량수전 현판>
무량수는 불교의 용어로 아미타불 및 그 땅의 백성의 수명이 한량이 없다는 뜻이랍니다.
<국보 제 45호 소조여래좌상>
무량수전의 내부는 일반 사찰과는 달리 정면에 불단을 배치한 것이 아니고 서쪽 면에 불단을 마련하고 국보 제 45호인 소조여래좌상을 모셔 놓았습니다.
무량수전의 각 출입문 마다 여래좌상의 사진촬영금지 팻말이 놓여 있어 직접 촬영은 하지 않고 밖에 앞 마당에서 문틈으로 조금 보이는 여래좌상의 옆 모습을 줌으로 땅겨봅니다.
<보물 제 249호 삼층석탑>
일반적으로 탑은 본당 앞에 서 있는데 이 절의 탑은 본당인 무량수전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보물 제 249호로 이중기단 위에 3층으로 올린 전형적인 3층 석탑으로 높이 5.26m이며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이랍니다.
1960년 해체 수리 당시에 3층 몸돌 중앙에 방형의 사리공이 발견되었으나 사리구는 없어졌고 기단부에서 철제탑, 불상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석등>
석탑을 둘러보다 보니 석탑보다도 그 앞에 서있는 조그만 석등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닥돌, 아래받침위에 서있는 팔각기둥이 지붕돌을 삐딱하게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인데 불을 밝히는 화사석이 망실되어 그렇게 조립해 놓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삐딱한 모습이 오히려 틀에 잡힌 삼층석탑의 딱딱함을 풀어주고 있는 느낌입니다.
<자인당과 응진전>
석탑을 돌아 숲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얕은 계곡을 지나니 조용한 숲 속에 응진전과 자인당이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서쪽 석불> <동쪽 석불>
자인당 안에는 석불 세 구가 모셔져 있는데 장소가 협소하여 담기가 어렵습니다.
이 중 양쪽에 있는 두 구의 석불은 부석사 동쪽에 있는 폐사지 있었던 것을 옮겨와 이 자인당 석불의 양측에 모셨는데 보물 제 220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이중 서쪽에 있는 불상은 없어졌던 두 손을 보수하여 놓은 것이고, 동쪽에 있는 불상은 9세기 후반기에 유행하였던 비로자나불상이라고 합니다.
<국보 제 19호 조사당>
온 길로 뒤돌아 얕은 협곡을 건너 조사당으로 갑니다.
조사당은 의상대사를 모신 곳으로 국보 제19호로 정면 세칸, 측면 한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16년 수리중에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고려 우왕 3년(1377)에 건립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시대 건축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합니다.
이 안의 벽면에 그려져 있던 제석천, 범천, 사천왕상의 벽화는 보장각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고요.
조사당 처마밑에는 철망으로 둘러 쌓인 조그만 나무가 있는데 의상이 사용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살아난 것이라는 전설이 있는데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서도 항상 푸르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의상이 죽을 때 “내가 여기를 떠난 뒤 이 지팡이에서 반듯이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으리라.”하였다는 기록이 택리지에 있다고요.
<지장전>
조사당에서 내려오는 길에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지장전을 둘러봅니다.
<부석>
길을 되짚어 다시 무량수전으로 내려와 서쪽에 있는 부석浮石을 봅니다.
그냥 엎드려 있는 바위로 보이는데 바위면 편편한 곳에 浮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요.
의상대사가 당나라로 유학을 갔을 때 ‘선묘’라는 낭자가 대사를 연모하였답니다.
공부를 마친 대사가 귀국 뱃길에 오르자 뒤늦게 이를 안 선묘가 달려 왔으나 이미 배는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없자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답니다.
대사가 이곳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많은 이교도 들이 방해를 하자 선묘신룡이 나타나 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올려 몰리쳤다고 하여 ‘부석浮石’이라고 불렀으며, 절의 이름도 부석사라고 하였고 선묘신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 아래 뭍혔다는 전설이 있답니다.
일설에는 일제강점기에 절을 수리할 때 무량수전 앞 마당에 밑에 석룡이 있어 다시 덮었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조선 숙종 때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는 바위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없이 드나들어 뜬돌임을 알 수 있다라고 했답니다.
<족보가 없는 석불들>
부석의 옆 언덕에는 석불세구가 서있는데 내력이나 이름에 대한 안내문도 없는 것을 보니 뜨내기 석불이었던 모양입니다.
<부석사의 공사장>
부석사의 조용한 경내를 이리 저리 돌아보며 금전이나 사람의 때가 거의 묻지 않은 맛에 한 바퀴를 더 돌아보는데 무슨 소음이 들립니다.
따라가 보니 절의 동쪽에 무슨 커다란 공사판이 벌어져 있고 레미콘 차가 계속 드나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것을 보니 여기도 몇 년 후에는 조용한 절의 분위기 보다는 관람객들과 신도들이 갖다 주는 돈에 찌들은 절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량수전, 안양문, 보장각, 장경각 등>
아쉬움에 다시 발길을 돌려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축을 일치 시키지도 않으면서 조화를 이뤄낸 가람배치를 담아봅니다.
<사과나무>
증축을 하려면 콘크리트로 쳐 바르지 말고 전통 건축양식으로 지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은행나무 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나서는데 길가 과수원의 사과나무에 달려있는 사과 몇 알이 붉은색으로 익어가고 있습니다.
한발물러 세상보기-kangjinee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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