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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글씨

북한산9070728)-바위글씨를 찾아서

2007728, 배낭을 꾸려지고 우이동 북한산 입구로 향합니다.
장마가 끝날 때도 되었건만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입니다.
오늘은 느긋한 기분으로 우이동에서 하루재를 거쳐 백운대를 올랐다가 위문을 통하여 북한산성계곡으로 내려가 주변에 있는 바위글씨를 찾아보고는 북한산장, 용암문을 거쳐 도선사로 하산하기로 합니다.
우이동 입구에서 항상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를 카메라에 담곤 했는데 오늘은 안개인지 비구름인지 시야를 가로막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하루재>
우이동입구에서 지금은 모 종교단체의 기도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고향산천까지 포장도로를 따라 오른 다음 여기서 포장도로를 버리고 우측의 제2백운매표소 쪽 등산로로 접어듭니다.
이 등산로가 폐쇄되었을 때는 매연을 품어대는 차량들로 붐비는 포장도로를 따라 도선사까지 가려면 짜증이 많이 나곤 했는데 이렇게 산길을 따라 하루재까지 바로 올라가니 분위기도 좋고 숨쉬기가 훨씬 부드럽습니다.
<인수봉>
하루재에서 영봉을 밟고 내려올까 말까 망서리다가 그냥 인수산장 쪽으로 내려갑니다.
인수산장을 못 미친 산기슭에서 인수봉의 실루엣이 조금 보여 그나마 사진기에 담아봅니다.
야영장을 지나 인수봉 전망대에 서보지만 안개가 더욱 짙게 끼어 인수봉의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안개속 백운대 등산로>
위문에 도착하여 잠시 시원한 바람으로 땀을 식히고는 백운대로 올라갑니다.
이렇게 궂은 날씨인데도 백운대를 오르는 사람들이 꽤 많이 보입니다.
백운대 옆구리를 건너가는데 세찬 바람에 구름들이 몰려왔다가 흩어지지만 앞쪽의 만경대와 건너편의 인수봉은 구름속에 얼굴을 숨기고 보여주지 않습니다.
<백운대>
백운대의 꼭대기에 있는 바위 아래에 서서 바로 위에 꽂혀 있는 태극기를 바라보니 안개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이게 안개가 아니고 구름의 가운데인가 봅니다.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북한산 정상에 걸려있는 태극기를 한 컷 담습니다.
<삼일운동 암각문>
백운대 꼭대기 바위에는 삼일운동 때에 최남선이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였고 당일 정재용 자신이 독립선언만세를 도창했다는 내용을 기록했다는 암각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이런 역사적 기록이 새겨져 있는 지 모르고 밟아 훼손이 되는 것을 방지하려고 위의 그림같이 보호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시구문>
백운대를 내려와 위문을 통해 우측 만경대 허리길을 버리고 곧바로 북한산성계곡으로 내려갑니다.
개연폭포를 지나 등운각 삼거리에서 바위글씨를 찾기 위해 중성문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중성문 바로 옆에 붙어 있으면서도 수풀에 가려 있어 별로 관심을 받지 못하는 시구문을 둘러보고 중성문을 지납니다.
<바위글씨 백운동문>
중성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 노적사로 입구를 조금 지난 곳에서 바위글씨를 찾기 위해 위쪽으로 난 길로 접어듭니다.
몇 미터 올라가니 바위글씨 백운동문(白雲洞門)이 세로로 새겨져 있는 바위를 만납니다.
북한산의 주봉이 백운대이니 백운동문이라는 이름도 거기서 연유된 것이 아닌지?
오늘은 백운대나 인수봉이 비구름에 잠겨있어 보이지 않지만 눈이 시리도록 파란 가을하늘에 백운대와 인수봉의 머리위로 흰 뭉게구름이 피어 오르는 모습이 머리에 그려집니다.
<용학사 선각 암각화>
바위글씨가 있는 바위를 뒤로 하고 비석거리로 가다가 용학사의 뒤쪽 바위에 선각으로 그린 암각화가 있다고 하여 찾아볼 겸 용학사라고 쓰인 팻말을 따라 용학사로 들어갑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절집 뒤쪽에 흰색으로 칠해져 있는 바위가 있어 그쪽으로 가보니 바로 암각화가 새겨져 있는 바위입니다.
흰색 페인트는 선각의 암각화를 잘보이게 하려고 칠한 모양인데 잘 보이지 않습니다.
가까이 가보고 싶지만 절집이 가로막고 있어 접근이 용이치 않네요.
여기서 봐도 선각으로 된 암각화 같은데 무엇을 그린 것인지는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사진으로 보니 그나마 사람형상의 그림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무엇을 그린 것인지는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바위글씨 최송설당>
용학사에서 다시 비석거리 아래로 내려와 개울건너 부왕사지로 가는 등산로로 접어드니 대낮인데도 마치 저녁처럼 어둡습니다.
이쪽에 있다는 바위글씨를 찾아 주변 바위를 살피며 올라가다 보니 등산로 우측에 제법 규모가 큰 바위가 있고 그 이마에 최송설당(崔松雪堂)이라는 바위글씨가 가로로 새겨져 있습니다.
최송설당은 남편과 사별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정진하다가 어린시절의 영친왕 보모가 되었으며 귀비(貴妃)에 봉하여지고 또한 고종으로부터 송설당이라는 호를 하사 받았으며 영친왕을 잘 돌본 공로로 많은 하사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분은 그 것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고 금릉학원(金陵學園)에 기부금을 내는 등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였고 19312월 전 재산을 희사하여 재단법인 송설학원(松雪學園)을 만들어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개교하였는데 오늘날의 김천중고등학교라고 합니다.
또한 이분은 시문에 능하여 많은 국문시가를 지었으며 저서로는 송설당집 3권이 있다고 합니다.
이 부왕사로 가는 길 옆 바위에 그분의 호가 있는 것은 아마도 그 분이 이쪽에 있는 부왕사와 인연을 맺었고 누군가 이를 기려 새겨놓은 것으로 추측을 해봅니다.
<바위글씨 청하동문>
조금 더 올라가니 길 왼편에 있는 바위에 청하동문(靑霞洞門)이라는 바위글씨가 가로로 새겨져 있습니다.
노적사 부근에 있는 바위글씨 백운동문과 이쪽의 청하동문 바위글씨가 서로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는 느낌입니다.
붉은 노을을 뜻하는 자하(紫霞)라는 글씨는 본적이 있는데 푸른노을이라는 청하는 처음 만나봅니다.
시인 묵객의 눈으로 보이는 푸른노을을 범부의 머리로 그려 보려니 무리인 것 같아 마음을 접습니다.
<바위글씨 일붕기도처>
바위글씨 청하동문이 새겨진 바위 옆면에는 일붕기도처(一鵬祈禱處)’라는 큰 바위글씨와 그 옆에는 날짜와 일붕서경보 대선사,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글씨체는 승가사에 새겨져 있는 서경보의 글씨체와는 달라보이는데 아마도 서경보스님의 글씨가 아니고 밑에 나열되어 있는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가 새겨놓은 것 같습니다.
서경보는 법명은 일붕(一鵬)이고 불국사 주지와 조계종 제주도종무원장을 지냈으며 일붕선교종을 창종하고 세계불교법왕청을 창립하여 법왕을 지냈다고합니다.
1950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했으며, 1969년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아 승려박사가 되면서 가장 많은 학위를 받은 인물로 기네스북에 오른 인물이라고 합니다
<부왕사지 초석>
바위글씨 청운동문에서 부왕동암문쪽으로 오르다가 부왕사지 안내판을 만납니다.
부왕동암문으로 가는 길에서 왼쪽으로 난 풀섶길을 따라 올라가니 제법 큰 규모의 장주형 초석들이 도열을 한 모습으로 맞이하는데 바로 여기가 부왕사지인 모양입니다.
부왕사는 조선의 숙종 때(43) 131칸 규모로 지어졌는데 6.25 전쟁 때 없어졌다고 합니다.
<부왕사지 표석>
초석이 도열해 있는 곳에서 한 단을 올라서니 네모진 부황사扶皇寺라고 쓰여진 오래된 표석이 박혀있고 그 뒤편 멀리에는 요즘의 불상이 한 구 모셔져 있습니다.
표석에 쓰여진 부왕사의 글자를 자세히 보면 부자의 좌측에 있는 손수手변과 우측에 있는 지아비夫가 뒤바뀐 모습으로 새겨져 있고 가운데 글씨도 왕()이 아니고 황()으로 보입니다.
어데선가 본 기억에는 부왕사의 표석 왼쪽으로 백운대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산줄기가 내려 뻗어 부왕사를 감싸 안은 형상이라 풍수에 따라 이렇게 지아비 夫와 손手변을 바꿔서 썼다고 되어있었습니다.
백운대쪽을 한번 바라보지만 비구름인지 안개인지 짙게 끼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부왕사지 안내문에 부왕사를 부황사(扶皇寺)라고도 불렀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니 가운데 글씨는 皇자가 맞는 모양이고요.
<용암문>
사진을 몇 컷 담고는 한낮인데도 짙은 안개 때문에 어두침침한 부왕사터에서 내려와 태고사에 있는 보물 제611호 원증국사탑비를 둘러보고 용암문을 거쳐 다시 우이동으로 하산을 하며 오늘의 바위글씨 찾기를 마감합니다.
<등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