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글씨 계수석이 있는 개울을 벗어나 시루봉의 반대쪽에 있다는 바위글씨 ‘귀록계산(歸鹿溪山)’과 ‘와운폭’을 찾아갑니다.
정확한 위치를 몰라 시루봉 기슭의 서쪽에서 남쪽으로 삥 돌아가며 개울이 있을 법한 곳을 찾아보는데 눈에 들어오는 개울이 없습니다.
<바위글씨-귀록계산 주변>
시루봉 동쪽으로 가니 도봉산에서 방학동으로 내려오는 등산로가 나와 찾기를 포기하고 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개울위로 나 있는 다리를 건너다가 혹시나 하고 길을 벗어나 개울을 따라 내려가 봅니다.
조금 내려가니 조그만 폭포의 모습을 갖춘 곳이 나오고 건너편 바위에 면을 다듬고 ‘귀록계산’이라고 새겨놓은 바위글씨가 눈에 들어옵니다.
조금 더 내려가 폭포의 아래쪽에서 보니 바위글씨’귀록계산(歸鹿溪山)’의 조금 아래쪽 맞은 편 바위의 평편한 사면에는 ‘와운폭’이라는 바위글씨도 눈에 들어오고요.
<바위글씨-귀록계산>
‘귀록’을 검색해보니 조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풍원군(豊原君) 조현명(趙顯命 1960~1752)이라는 분이 호를 귀록(歸鹿)으로 사용하였다고 하고 남산기슭의 필동2가에 귀록정이라는 정자를 짖고 살았다고 합니다.
영조 때 6년 동안이나 재상직에 있으면서 정권을 장악했으되 대쪽 같은 성품으로 사사로움이 없이 공정하게 정사를 보았고 영조의 탕평책에 적극 협조를 하였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여 두차례나 파직을 당하기도 했으나 영조의 신임은 잃지 않았다고 하는데, 두 차례의 파직과 복직이 ‘귀록’이라는 호와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저서로는 귀록집 등이 있다고 합니다.
<바위글씨 귀록계산>
이분에 대해 좀더 알아봅니다.
<숙종 45년(1719)에 문과에 급제하고 영조 4년(1728)에 이인좌(李麟座)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풍원부원군의 작위를 받았으며 영조 16년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성품이 청렴 검소하고 입론이 공평 강직하여 일세의 신망을 받았으며 또 분분한 관계보다는 향리의 전원생활을 동경하여 관직에 있는 중에도 이 곳 집 근처에 정자를 짓고 그의 호를 따서 ‘귀록정’이라 하였는데 옛글에 ‘사슴수레를 함께 잡고 시골로 돌아간다’는 뜻을 인용하였다 하며, 또 당시 정자 밑에 푸른 실끈으로 사슴을 매어 놓아 언제든 그 사슴이 끄는 수레를 타고 향리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다.>
<바위글씨 귀록계산>
네모지게 바위면을 다듬어 그 위에 새긴 바위글씨는 행서체로 글씨를 모르는 내눈에도 멋 있는 달필로 보입니다.
귀록 조현명 대감께서 어떤 일로 이 곳에 오게 되어 며칠을 머물다 보니 조용하고 아늑한 이곳이 맘에 들자, 당쟁으로 머리가 아픈 관직을 훌훌 털어버리고 이런 곳에 들어와 유유자적하며 지냈으면 하는 마음을 이런 글씨로 남겨 놓은 게 아닌가 합니다.
kangjine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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