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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글씨

바위글씨(17) 석굴암 김구 불-도봉산

의정부 가는 전철을 타고 도봉산역을 지나 회룡사역에서 내립니다.
회룡사로 가는 포장된 길을 따라 가다가 다리를 건너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 지는데, 회룡사 쪽을 버리고 석굴암 쪽을 택합니다.


<석굴암 불이문>
시멘트로 포장된 지루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바위 두개가 머리를 맞대고 있고 그 아래로는 다리를 벌려 통로를 내고 있는 바위길을 만납니다.
오른 쪽 바위머리에 불이문(不二門)이라고 씌여져 있어 석굴암의 산문임을 짐작케 하고 있습니다.
불이문을 통하여 석굴암을 들어갑니다.


<석굴암과 주변의 바위글씨-石屈庵, 金九, 佛>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아래로 암자치고는 너무 크게 지은 당우의 지붕이 엎드려 있고 오른 쪽으로는 세개의 바위 사이에 석굴로 이루어진 석굴암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새개의 바위에는 각각 석굴암石屈庵, 김구金九, 불佛이라는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바위글씨 석굴암>
불이문 옆에 (김구 선생 필적)이라는 제목의 안내판이 서있는데 향토유적 제 8호랍니다.
내용을 읽어봅니다.
<바위글씨 석굴암>
회룡사 경내에 있는 석굴암은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이 상해로 망명하기 전 한 때 피신했던 곳으로 , 해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되어 귀국한 선생은 이곳에 자주 들려 자연을 즐기며 고금을 회상했다고 합니다.
<바위글씨 무자중추유사 백범 김구>
이어서, 석굴암 입구의 3개의 거대한 자연석 위에 각기 石屈庵, 佛, 戊子仲秋遊此 金九라고 새긴 바위글씨가 있는데 당시 언론인 남상도 외 7인이 선생의 친필을 받아 1949년 3월 부터 약 3개월간 조각한 것이랍니다.
<바위글씨 무자중추유사 백범 김구>
아울러, 선생의 웅혼한 정신이 담긴 이 필적과 함께 선생의 위패를 모신 백범사(白凡寺)가 사우(祠宇)내에 있어 봄 가을로 배향되고 있다고 하고요.
그런데 백범寺가 祠宇내에 있다는 표현이 좀 그러네요.
사당이 절 안에 있는 것이 보편적인데 사당안에 절이 있다는 게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바위글씨 불佛>
좀 자세히 알아보려고 여기 저기 검색을 해보니까 경인일보에 연재되었던 기사 한 꼭지가 있어 엮어봅니다.
함흥에서 돌아온 조선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기거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는 "회룡사"로 오르는 중턱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석굴암(石屈庵)'이 나오고 여기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명문이 있는데 이 명문은 일제의 패망으로 귀국한 선생이 전에 피신생활을 하던 이 곳에 가끔 들리었고, 몇몇 사람이1949년 3월에 선생의 친필을 받아 명문을 조각하기 시작하였으며 3개월에 걸쳐 완성되었답니다.
그러나, 6월 26일 이 명문의 준공식을 하는 날 백범선생이 피살되었다고 하네요.


<바위글씨 佛>
그리고 그 기사에는 "석굴암 앞에서 백범 선생(오른쪽에서 두번째)이 지인들과 함께 사진을 촬영했는데, 이 사진은 당시 준공식날 기념촬영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백범 선생의 살아 생전 마지막 모습을 담은 유물"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사진이 삭제되었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위글씨 미륵불>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이 한꼭지의 기사를 보고 나니 이 바위글씨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깁니다.
석굴암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바위에도 누가 새겼는지 알 수 없는 바위글씨 "미륵불"이 묵묵히 석굴암 쪽을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이 바위글씨를 보니 금강산의 구룡폭포 암벽에 있던 바위글씨 "미륵불"이 떠오릅니다.


<금강산 구룡폭포 암벽의 바위글씨 미륵불>
김일성이 그 바위글씨를 보고는 선조들의 소중한 유물이니 잘 관리하라고 교시 했다는 내용이 안내문에 있었는데 그도 바위글씨에 관심이 많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바위글씨를 둘러보았습니다.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