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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국보 제78호,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용산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의 3층 불교조각관에는 국보 78호와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교대로 전시하는 전용 전시장이 있습니다.

내부는 아주 어둡게조명을 하였고,반가상 정면 벽에는나무 의자가 있어 앉아서 감상도 가능합니다.

이 곳에 앉아서 출가하기 전에 고뇌하던 부처의 모습을 고즈녁한 분위기에서 누려볼까 하지만,

밀려드는 단체 관람객과 이들을 안내하는 해설자의 수다에......

혼탁한 눈으로 명품을 평하기는 주제가 사납고......

이구열의 "한국문화재 수난사"라는 책에서이 두점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에 대해 알아봅니다.

국보 제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국보 제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1912 2 21일 이왕가(李王家)박물관은 2,600원의 거금을 주고불후의 걸작품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구입합니다.

이것을 판 가지야마라는 놈은 무법의 약탈자를 거느리고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고물상이었답니다.

그런데총독부도 그의 불법 행위를 모른 체 하여, 결국 그 반가상의 반출지를 추궁받지도 않았고,

오히려 증거인멸의 술책으로 반출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곳에서 나왔다고 둘러 대어 이 걸작품의

내력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에 묻혀있게 하였답니다.

고의적인 증거인멸로전문가들은 이 놈들이허위로 퍼뜨린 풍문으로 이 반가상의 출처를 추측하게

되는데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를 하였던 '세끼노'는 “이 반가상은 경주 남쪽 오릉 부근의

폐사지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라고 하였답니다.

애궁~조명과 받침이 없이 사진을 담다보니 많이 흔들렸네요.^^;

<국보 제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동경제대 조교수인 ‘세키노’는 1902년에 대한제국정부의 초청으로 우리나라의 옛 건물과 고적의

실태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일제의한반도 침략계획에 필요한 모든 정보수집을 위해 일방적으로

각 분야를 시찰.조사하였고, 1904년에 “한국건축조사보고”에 포함시켜 발표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902년에 세키노가 한국에 왔을 때 개성에 살던 한 일본인에게 신세를 지었는데, 그 보답으로

“한국건축조사보고서”를 한 부 그 사람에게 보내 주었다고 하네요.

그 보고서는 이후 일본놈들이 우리 문화재를 약탈하는데 지대한 ‘정보제공’의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국보 제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아사가와라는 사람은 “조선의 미술공예에 관한 회고”에서

“당시 이왕가박물관 관장이 말하기를출현지로 믿어지는 경주로부터 서울로 올라 왔을 때 표면을

두터운 호분으로 칠하고 면상을 먹으로 그렸는데~”라고 하여 이 반가상이 이름모를 폐사지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고 어느 사찰에서 몰래 약탈, 또는 협박 매수하여 서울로 갖고 왔음을 시사하였답니다.

<국보 제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1915년 이네다라는 사람이 '조선에 있어서의 불교예술 연구'라는 글에서 아래와 같이 이 반가상에

대한 증언을 하여 세키노의 경주출토설의신뢰성을 떨어지게 하였답니다.

1910년에 충청도에서 올라왔는데 삼국시대 말기의 대표적인 미술품이며 세키노도 감탄하였고,

또 독일의 박물관 기사도십만 금도 아깝지 않은 진품이라고 하였다.

<국보 제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이 ‘이네다’라는 사람은 한일합방 전에 계룡산에 머물며 한국의 불교문화와 유물을 조사 연구했던

일본인 으로 한국 말도 꽤 잘하였답니다.
그가 이 반가상이충청도에서 올라왔다고 단정적으로 쓴 데는 어떤 정보와 내막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1910년도에 서울로 올라왔다는 대목도 신빙성 있는 증언으로 보인답니다.

이 반가상은 2년 동안 몇 다리 건너서, 또는 가지야마가 감추고 있다가 이왕가 박물관의 스에마쓰

관장과 은밀히 접촉하여 거금에 팔아 먹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고 있답니다.

이네다의 기록으로 충청도에서 출토한 백제불 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으며, 고유섭 선생도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그것이 백제의 것인지 신라의 것인지 확실치 않다.’고

경상도 출토설에 회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이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지금 국보 제 83호로 지정되어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국보 제 78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국보 제 78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비슷한 시기인 1912년 걸작품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한구가 어디선가 불법 반출되어 서울에서

판로를 찾다가 관헌의 주목을 받자, 국보 83호와는 달리 기증 형식으로 총독관저에 증여하였답니다.

그 기증자는 ‘후치가미’란 자였는데 아마도 가지야마라는 놈과 같은 장물아비였거나 우리 문화재를

전문적으로 약탈하는 배후의 조종자로 보이는 녀석이라고요.


<국보 제 78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총독관저에 들어온 이 반가상에 대하여 위에 언급한 세키노는

“애석하게도 출처가 명백하지 못하다. 아마도 경상도에서 발견된 것인 듯하다”고 자신없는 추측만

하였다고 합니다.

약탈한 놈들이 유물의 불법적인 반출지나 출토지를 감추고, 또 반출 혹은 약탈경위와 증거를 완전히

없엤기 때문에 이런 훌륭한문화재를저 위에 언급한 국보 제 83호나 이 것과 같이내력을 알 수 없게

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되었답니다.


<국보 제 78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당시 총독이던 데라우찌는 1916 4 18 총리대신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학계에 너무 잘

알려진 이 걸작 불상을 일본으로는 가져가지 못하고, 1915년에 발족된 총독부박물관에 기증을 하여

지금은 국보 제 78호로 지정,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 2 ,국보 제 78호와 83호는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불교조각관에 설치된

전용 전시관에서 전시하고 있는데 어떤주기로 교대로전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끔 이 두 명품의 사진 그림을 보고 비교를 해보면 간결함과 세밀함이 우리 눈에 느껴지는차이를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꼭불국사에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과 같은......

오늘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금동미륵반가사유상에 내력을 훑어 보았습니다.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