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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쌍둥이 국보 제78호,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용산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의 3층 불교조각관에는 국보 78호와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교대로 전시하는 전용 전시장이 있습니다. 내부는 아주 어둡게조명을 하였고,반가상 정면 벽에는나무 의자가 있어 앉아서 감상도 가능합니다.이 곳에 앉아서 출가하기 전에 고뇌하던 부처의 모습을 고즈녁한 분위기에서 누려볼까 하지만,밀려드는 단체 관람객과 이들을 안내하는 해설자의 수다에......혼탁한 눈으로 명품을 평하기는 내 주제가 꼴 사납고......이구열의 "한국문화재 수난사"라는 책에서이 두점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에 대해 알아봅니다.국보 제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1912년 2월 21일 이왕가(李王家)박물관은 2,600원의 거금을 주고불후의 걸작품인“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구입합니다.이것을 판 가지야마라는 놈은 .. 더보기
국보 제 119호 년가칠년명금동불입상 - 국립중앙박물관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불교 조각실에 등뒤에 배 모양의 광배를 달고 있는 금동불상이 좀 어두운 조명 속에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밑에 있는 명패를 보니 '국보 제 119호 연가7년명금동불입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래쪽에서 비치는 조명이 몸체에 가려 얼굴 부분이 어두운데 그래서 인지 불상의 표정을 읽기가 쉽지 않아 좀 신비로운 느낌도 듭니다.이 불상에 대한 뒷 얘기가 '한국문화재수난사-이구열'라는 책에서 읽어봅니다.1963년 7월 16일,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칠순의 시어머니와 5 남매를 거느리고 막벌이 가장을 하던 당시 41세의 아주머니가 큰아들을 데리고 도로 공사장에서 돌을 나르는 일을 하다가 돌 무더기 속의 폭30Cm, 길이 40Cm, 깊이가 30Cm정도 공간에 반듯이 누워있는 금빛.. 더보기
농경문청동기-국립중앙박물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담아온 농경문청동기 사진과 그 해설문입니다. 방패형 동기로서 무당이나 권력자가 몸에 달거나, 의식 때 매달아 풍년을 비는 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물, 농기구, 경작지 등을 추상적인 선으로 묘사해 당시의 회화 수준을 짐작하게 해주는 귀중한 유품이다. 제한된 공간에 사물의 중요한 점만을 요점적으로 표현한 청동기 시대의 회화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아랫부분은 파손되고 윗쪽 일부만 남아 있다. 기와 지붕 모양의 위쪽 가장자리에는 여섯 개의 네모진 구멍이 같은 간격으로 뚫려 있다. 양면에 모두 선문(線文)과 격문(格文) 등으로 이루어진 윤곽선이 돌려져 있다. 그 안을 다시 격문대를 중심으로 좌우 2구로 나누어 여기에 섬세한 문양을 음각하였다. 앞면에는 좌우 2구에 각각 인물이 있.. 더보기
국보제191호 황남대총 금관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화재의 하나는 신라관 중앙의 유리상자 안에 진열되어 있는 국보제191호 황남대총금관으로 생각됩니다.여기에는 항상 사람이 붐비고 있어 사진을 담기가 가장 어려운 곳이고요.좀 한가한 시간대인 폐관 무렵에 사진을 담아보지만 밝은 주변과 유리상자, 그리고 어두운 조명으로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한국문화재 수난사"라는 책에서 이 황남대총 금관은 아니지만 금관총 금관 등에 담겨있는 숨은 얘기를 찾아봅니다.1927년 11월 10일 밤에 경주박물관에 도둑이 들어 유물 진열실의 자물쇠를 부수고 신라 왕릉에서 발굴한 과대, 요패, 귀고리, 팔찌, 반지 등 순금제 유물을 몽땅 싸가지고 사라졌는데, 다행히 금관총 금관은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이 도난 당한 순금제 문화재는 .. 더보기
국보3호 삼각산 진흥왕순수비와 추사 김정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금석문실에는 국보 3호인 북한산 진흥왕순수비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비봉에 올라가서 이곳이 진흥왕의 순수비가 있던 자리라고 세워놓은 표석을 보다가 이렇게 실물을 보고 있으려니 그 앞을 떠나기가 싫어집니다. 마침 '한국문화재 수난사'라는 책에 추사 김정희가 이 비를 판독한 것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어 읽어보고 그 요점을 옮겨봅니다.순조16년(1816) 추사가 친구 김경연과 같이 비봉에 올라 비문을 조사하고, 이것이 1750년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에 ‘무학대사가 태조를 도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자 백운대에서 줄기를 따라 비봉에 이르러 ‘무학이 이곳을 잘못 찾아 왔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 있어 발길을 되돌렸다’라고 기술된 것과는 달리 신라 진흥왕순수비라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합니다.. 더보기
보물365호 흥법사진공대사탑과 석관 용산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보물 제365호, 흥법사진공대사탑을 둘러봅니다. 이 탑은 강원도(江原道)원성군(原城郡)지정면(地正面)안창리(安昌里)흥법사(興法寺)터에 있었는데 1931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다고 하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일제억압기에 조선침략을 미화하고,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앞선 과학기술을 보여주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 즉 요즘의 박람회를 열었답니다.그 때에 이 박람회의 공간확보를 위해 궁내의 많은 전각들을 해체를 하였고, 조경을 위해 조선 각지에 있는 회귀한 불상, 탑, 부도 등을 옮겨 놓았다고 하는데 그런 과정에서 이 탑도 이쪽으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닌가 추측을 해봅니다.남의 나라 문화재를 마구잡이로 훼손한 일본놈들.. 더보기
보물364호 나주서문석등 - 불을 밝히는 의미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야외에 전시된 석물중에 보물364호인 "나주서문석등"을 둘러보며 석등옆에 있는 안내문을 읽어봅니다. "이 석등 기단부는 긴 팔각기둥과 위,아래에 연꽃을 장식한 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가운데 긴 팔각 기둥돌은 간주석(竿柱石)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새겨진 글을 통해 고려 선종10년(1093)에 만들어진 석등임을 알 수 있다. 불발기(火舍石)는 원래 파손되어 없었으나, 1929년 나주에서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새로 만들었으며, 맨 꼭대기 장식도 새로 만든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이 안내문을 보니 나주에서 옮겼고 1093년에 제작되었으며, 망실된 화사석과 보주를 다시 만들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석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화사석이 없는 석등이 보물로 지정된 것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 더보기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과 채핀할머니-보물190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동 남쪽 뜰에는 석물로 된 문화재 몇 점이 세워져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보물제190호인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을 살펴봅니다. 먼저 승탑옆에 있는 안내문을 읽어봅니다.원공국사 지종(圓空國師 智宗;930~1018)의 묘탑인데 강원도 원주 거돈사터에는 이것과 짝을 이루는 탑비가 남아있답니다.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승탑형식으로 단정하고 균형잡힌 팕가의 형태에 사천왕, 팔부중 등의 부조상이 새겨져 있으며 탑신 정면 문 위에 탑이름을 새긴 점이나 탑신에 꽃띠 장식을 한 것 등은 고려시대에 새롭게 시도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좀더 자료를 찾아봅니다. 거돈사터에 남아 있던 고려 전기의 승려 원공국사의사리탑으로, 일제시대에 일본넘의 집에 소장되고 있던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다가,.. 더보기
국보104호 염거화상탑 (부도)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관 앞뜰에 놓여 있는 국보제104호 염거화상 승탑(부도)을 둘러봅니다. 먼저 이 승탑의 앞에 있는 안내문을 읽어봅니다. 이 승탑은 탑지(塔誌)가 함께 전해져, 승탑의 주인공과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라고 합니다. 신라 문성와 6년(844)에 선종 산문의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대 선사인 염거화상(?~844)을 위해 만들었는데, 팔각집의 모양에 사천왕 등의 부조상을 새긴 전형적인 승탑의 모습이라고요. 이후 승탑들은 이 승탑을 따라 대부분 팔각구조에 화려한 부조상을 새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부도의 근원을 살펴보면 구산선문의 첫째인 가지산문의 제1조 도의선사 부도가 효시라고 합니다. 도의선사는 748년 당나라로 건너가 35년간 달마대사로 부터 이어져온 선종인 홍주종.. 더보기
보물제282호 고달사 쌍사자석등 중앙박물관 전시관의 팔부중복도에는 3가지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석탑의 팔부중, 경천사지십층석탑과 그리고 보물 282호인 "고달사쌍사자석등"입니다. 쌍사자석등 밑에 붙어 있는 안내문의 설명이 미흡하여 고달사를 검색하여 보완을 해봅니다. 고달사지는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절은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어 신라시대 이래 나라 안 큰 사찰 세 곳 중 하나인 고달원(高達院)이었는데, 누가 창건했으며 언제 폐사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고려 때까지는 고달원이라고 불리웠고요.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승인 원종이 이곳에서 선림을 이룩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시키면서 고달원을 중흥시켰는데 그는 고려 혜종과 정종으로부터 가사를 내려 받았으며 광종으로부터는 국사로 책봉되었고 또한 증진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