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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3호 삼각산 진흥왕순수비와 추사 김정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금석문실에는 국보 3호인 북한산 진흥왕순수비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비봉에 올라가서 이곳이 진흥왕의 순수비가 있던 자리라고 세워놓은 표석을 보다가 이렇게 실물을 보고 있으려니 그 앞을 떠나기가 싫어집니다.



<삼각산 진흥왕순수비 - 앞면>
마침 '한국문화재 수난사'라는 책에 추사 김정희가 이 비를 판독한 것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어 읽어보고 그 요점을 옮겨봅니다.
순조16년(1816) 추사가 친구 김경연과 같이 비봉에 올라 비문을 조사하고, 이것이 1750년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에 ‘무학대사가 태조를 도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자 백운대에서 줄기를 따라 비봉에 이르러 ‘무학이 이곳을 잘못 찾아 왔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 있어 발길을 되돌렸다’라고 기술된 것과는 달리 신라 진흥왕순수비라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합니다.
탁본을 갖고 내려온 추사는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네 글자에 주목을 하고 “삼국사기”의 기록인 ‘진흥왕 29년(568)에 북한산주를 패하고 남천주를 두다.’로 미루어 그 이후에 세워진 것이고 진흥왕 순수비로 고증을 하였다고 합니다.
추사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운석 조인영과 1817년 6월 8일 다시 비봉에 올라가 최종 68자를 확인하고 탁본을 하여 다른 탁본 96종과 같이 청나라의 금석문학자인 유희해에게 보내주었고 유희해는 청나라에 가만이 앉아서 “해동금석원”과 “해동금석존고”라는 두권의 조선 금석문 책을 펴내었고, 그 바람에 비봉의 비가 진흥왕순수비라는 귀중한 금석문사료는 국내가 아니라 청나라에서 발간한 책속에 먼저 수록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삼각산 진흥왕순수비 좌측면의 추사의 각자>

추사는 이 비문을 판독한 후에 비문의 측면에 ‘이 진흥왕순수비는 병자년(1816) 7월에 김정희, 김경연이 화서 읽었다.’라는 내용과 ‘정축년(1817) 6월 8일에는 김정희, 조인영이 같이 와서 읽을 수 있는 68자를 심정(審定)했다.’라는 각자를 새겨놓았다는데 바로 위의 그림에 있는 글씨입니다.
이미 발견된 진흥왕순수비로는 황초령비, 마운령비 및 창녕비가 있었으며 창녕비는 진흥왕22년(561)에 제일 먼저 세워진것으로 국보 3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추사는 “동국문헌비고”에 이미 ‘해동집고록’에 기록되어 있는 황초령비의 내용을 참작함으로써 북한산비의 고증에 확신을 가졌으며 그 후 1852년 친숙한 관계인 함경도관찰사 윤정현의 도움으로 황초령의 진흥왕정계비의 탁본을 입수하여 다시 한번 고증을 하였고, 이를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境)이라는 여섯자의 현판글씨와 황초령비의 역사적 가치를 재인식 시키는 비문을 짓고, 추사체로 자필하여 함경도로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이를 받은 윤정현은 현판글씨는 관찰사가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세운 비각에 걸었고, 비문은 황조령비의 옆에 유적 해설비로 세웠는데, 비문에는 ‘윤정현 書’로 되어 있으나 금석학자(임창순)들은 추사의 글씨라고 감정하고 있답니다.
비문의 내용은 ‘이 신라 진흥왕비는 동북정계로 구지는 황초령인데 둘이 위아래로 떨어져 나가고 글자가 185자만 남았다. 지금 중령으로 옮겨 비각으로 덮고, 암벽에 끼워노았다. 황초령과 멀지 않아 경계에 큰 차는 없다. 옛날 탁본을 가지고 보면 첫줄 왕(王)자 아래에 ‘순수관경간석명기(巡狩管境刊石銘記)의 글자가 있다. 아울러 기록하여 없어진 것을 보충한다.’라고 되어있답니다.



<삼각산 진흥왕순수비 우측면>
이후 추사는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을 남겼는데 북한산비와 황초령비에 대한 고증과 해설을 기록한 필사본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1.진흥은 시호가 아니라 생존시에 사용한 칭호이다.
2.삼국사기에는 진흥왕의 북순(北巡)이 누락되어 있으며, 안변을 국경으로 한 것은 잘못이다.
3.진흥왕은 독자적인 연호를 썼고, 짐(朕), 제왕(帝王)이라는 칭호를 쓴 체제가 확고한 독립국을 뜻한다는 것 등과 신라의 지명, 관명, 인명 등이 분석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한 추사는 44세(1830) 때 묘향산을 다녀오다 평양의 옛 성벽에서 ‘평양 성벽석각’금석문을 발견하고 이 석각편에서 물하소형(物荷小兄) 등 마멸이 심한 20자 내외의 글자를 갖고 자체의 고법과 단편적인 고구려의 관직명을 들어 ‘틀림없는 고구려의 금석문’이라고 갈파하여 그 유적이 고구려의 유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도 하였는데, 그 후 어떤 경위로 그랬는지 모르나 평양의 성벽에서 떼여져 서울로 운반되었는데 1965년 이대 박물관으로 들어갈 때 까지 위창 오세창 집안에서 보관되었있었다고 합니다.



<삼각산 진흥왕순수비 뒷면>
추사 김정희는 1786년에 판서의 아들로 태어나 1856년에 71세로 타계하였는데, 그는 일찍이 청나라에 갔을 때, 당시 북경의 유명한 석학이던 완, 옹방강을 가까이 접촉하였고, 이후 그들과 게속 친교를 맺으면서 학문을 닦았다고 합니다.
타고난 총명과 끊임없는 탐구는 이윽고 경학, 사학, 고증학, 서예, 금석하에 걸쳐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깊고 넓은 학문과 예술의 경치를 개척하였다고요.
그는 등과를 하여 암행어사와 병조판서를 역임했으나 정치사건에 연루되어 전후 10여년간 제주도와 북청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그의 학문과 예술은 찬연하게 연마되었다고 합니다.


<삼각산 비봉의 진흥왕순수비 유지 표석>
이 진흥왕순수비가 있던 자리에는 위의 그림처럼 이를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삼각산 진흥왕순수비에 대한 문화재청의 설명을 옮겨봅니다.
이 비(碑)는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16년(555)에 왕(王)의 국경순수기념비(國境巡狩記念碑)의 하나로 북한산(北漢山) 비봉(碑峰)에 세워졌던 것이며, 삼국시대(三國時代) 금석문(金石文) 중 가장 유명하고 귀중한 것이다. 1400여년의 오랜 풍우(風雨)로 그 비신의 보존이 어려워 이를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1972년 8월 25일에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眞興王巡狩碑興太王及衆臣等巡狩管境之時記□分甲兵之□□□年□□□□覇主設□賞□所用高祀□□□□□□相戰之時新羅太王德不□兵故□□□□□强建文大득人民□□□□□□□□□□□□□□□□□□□□如有忠信精誠□□□□□□徙可加賞舜物以□□心引□□衆路過□城陟□□見道人□居石窟□□□□刻石誌辭□□尺干內夫智一尺干沙喙□□智近干南川軍主沙夫智及干未智大奈末□□□沙喙屈丁次奈天指□□幽則□□□□□劫初立所造非□巡守見□□□□□刊石□□□記我万代名

이 비문은 조선(朝鮮) 순조(純祖) 16년(1816, 병자(丙子)) 우리나라 금석학(金石學)의 대가인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선생이 친히 북한산 비봉에 올라 처음으로 판독하였다.

그리고 옆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자가 새겨져 있어 그와 같은 사실을 전하여 주고 있다.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 丁丑六月八日金正喜趙寅永同來審定殘字六十八字"


<국보3호 삼각산 진흥왕순수비의 원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기 전, 삼각산 비봉에 있을때의 진흥왕순수비 사진을 검색, 빌려다 여기에 살짝 올려놨는데 이 사진의 출처를 메모한 것이 없어졌네요.
그래서 출처도 밝히지 못하고 그림만 올립니다.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