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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제191호 황남대총 금관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화재의 하나는 신라관 중앙의 유리상자 안에 진열되어 있는 국보제191호 황남대총금관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는 항상 사람이 붐비고 있어 사진을 담기가 가장 어려운 곳이고요.
좀 한가한 시간대인 폐관 무렵에 사진을 담아보지만 밝은 주변과 유리상자, 그리고 어두운 조명으로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국보제191호 황남대총 금관 - 우측면>
"한국문화재 수난사"라는 책에서 이 황남대총 금관은 아니지만 금관총 금관 등에 담겨있는 숨은 얘기를 찾아봅니다.
1927년 11월 10일 밤에 경주박물관에 도둑이 들어 유물 진열실의 자물쇠를 부수고 신라 왕릉에서 발굴한 과대, 요패, 귀고리, 팔찌, 반지 등 순금제 유물을 몽땅 싸가지고 사라졌는데, 다행히 금관총 금관은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도난 당한 순금제 문화재는 5개월 뒤인 1928년 5월 20일 새벽에 누군가가 경찰서장 관사 앞을 가져다 놓아 무사히 회수를 하였다고요.
그 때 도난 당했다 돌아온 금관총 과대와 요패는 그 후 국보 제 88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답니다.

<국보제191호 황남대총 금관 - 우측면>
그렇게 도난을 모면한 그 금관총 금관은 그 뒤 1956년 다시 경주박물관에 도둑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유물을 손을 대지 않고 이 국보 금관만 홈쳐가지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분실된 금관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모조품이었다고요.
경주박물관에서는 도난당한 금관이 모조품이라는 것을 발표했고 신문들도 그렇게 보도했고 그 기사를 본 범인은 서천께로 도피해 가서 모래밭을 깊숙이 파고 그 속에 모조 금관을 묻었지만 얼마 후 검거가 되어 모든 경위를 자백했는데 서천 모래밭에 가서 금관을 수색했지만 결국은 찾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이 금관총 금관은 국보 제 87호로 관리되고 있답니다.


<국보제191호 황남대총 금관 - 좌측면>
또 한 8.15 직후에 서울의 국립박물관에도 도둑이 들어와 금령총 금관과 서봉총 금관을 홈쳐갔는데 이 금관들도 경주에서 도난당한 금관총 금관과 같이 만든 모조품이었다고 하는데 찾지를 못했다고 하네요.
이 금령총 금관은 보물 제 338호, 서봉총 금관은 보물 제 339호로 관리되고 있답니다.


<국보제191호 황남대총 금관 - 좌측면>
이 금관에 대한 설명을 문화재청 자료에서 찾아 봅니다.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되었는데 신라 금관을 대표하는 것으로 높이 27.5㎝, 아래로 늘어뜨린 드리개(수식) 길이는 13 ∼ 30.3 ㎝이다.
이마에 닿는 머리띠 앞쪽에는 山자형을 연속해서 3단으로 쌓아올린 장식을 3곳에 두었고, 뒤쪽 양끝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을 2곳에 세웠다. 푸른 빛을 내는 굽은 옥을 山자형에는 16개, 사슴뿔 모양에는 9개, 머리띠 부분에 11개를 달았다. 또한 원형의 금장식을 균형있게 배치시켜 금관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하였다.
아래로 내려뜨린 드리개는 좌·우 각각 3개씩 대칭으로 굵은 고리에 매달아 길게 늘어뜨렸다. 바깥의 것이 가장 길고, 안쪽으로 가면서 짧아진다. 장식 끝부분 안쪽에는 머리띠 부분과 같은 푸른색 굽은 옥을 달았고, 바깥쪽에는 나뭇잎 모양의 금판을 매달았다. 발견 당시 금관과 아래로 내려뜨린 드리개들이 분리되어 있었다.
이 금관은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어느 것보다도 굽은 옥을 많이 달아 화려함이 돋보이고 있다.>


<국보제191호 황남대총 금관 - 정면>
문화재청의 전문자료를 찾아봅니다.
<관(冠)은 3개의 연속산자형(連續山字形)과 2개의 녹각형(鹿角形)의 입식(立飾)이 있는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연속산자형(連續山字形) 입식은 3단이며 관(冠)의 전 표면에 무수한 원형 영락을 달았고 연속산자형(連續山字形) 입식에는 16개씩, 녹각형(鹿角形) 입식에는 9개씩, 대륜(臺輪)에는 11개 합계 77개의 비취곡옥(翡翠曲玉)을 달았다. 수식(垂飾)은 긴 것을 밖으로 하여 차례로 장단(長短) 3줄씩이 좌우에 붙어 있다.>

<국보제191호 황남대총 금관 - 후면>
계속해서 읽어봅니다.
<모두 태환(太環)이 달려 있으나 어떠한 방법으로 연결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가장 긴 (1)은 세환(細環) 2개를 태환(太環) 중간고리에 걸고 그 중 하나에 많은 작은 영락이 달린 금사슬을 길게 연결하였으며 끝에는 반구형(半球形) 뚜껑이 덮이고 영락이 달린 삼엽형(三葉形) 금판(金板)을 달았다.
중간의 (2)는 (1)과 동형(同形)이다. 중간고리가 하나이고 길이가 짧다.
(3)은 태환(太環)에 2가닥 수하(垂下)를 달았는데 하나는 앞의 것과 같은 금사슬 끝에 반구형(半球形) 뚜껑을 씌운 경옥제(硬玉製) 곡옥을 달았고 다른 1가닥에는 화문형(花文形) 중간부 끝에 심엽형(心葉形) 수식을 달았다.
3줄의 수식이 모두 금관(金冠) 아래에서 발견되어 금관(金冠)에 붙었던 수식이 아니었던가 추정되는 것이다.>


<국보제191호 황남대총 금관-문화재청자료>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