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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364호 나주서문석등 - 불을 밝히는 의미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야외에 전시된 석물중에 보물364호인 "나주서문석등"을 둘러보며 석등옆에 있는 안내문을 읽어봅니다.


<보물364호 나주서문석등>
"이 석등 기단부는 긴 팔각기둥과 위,아래에 연꽃을 장식한 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가운데 긴 팔각 기둥돌은 간주석(竿柱石)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새겨진 글을 통해 고려 선종10년(1093)에 만들어진 석등임을 알 수 있다. 불발기(火舍石)는 원래 파손되어 없었으나, 1929년 나주에서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새로 만들었으며, 맨 꼭대기 장식도 새로 만든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안내문을 보니 나주에서 옮겼고 1093년에 제작되었으며, 망실된 화사석과 보주를 다시 만들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석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화사석이 없는 석등이 보물로 지정된 것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어 문화재청의 자료 등을 찾아봅니다.



<나주서문석등 상부>
석등의 상부인 지붕돌과 보주의 부분입니다.
문화재청 자료의 설명을 보니 "지붕돌은 매우 장식적으로 8개 면마다 처마 끝에 짧은 막을 드리운 것처럼 세로줄무늬가 있고, 그 위로 말 피어오르는 형상의 꽃장식이 두툼하게 달려있다. 맨 꼭대기에 올려진 연꽃봉오리모양의 돌은 석등을 옮겨 세울 때 세로 만든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다 자세하게 설명을 해 놓으것을 찾아봅니다.
처마끝의 전각부(轉角部)에는 이른바 삼산입상형(三山立狀形)의 귀꽃이 마련되었으며 각 귀꽃 사이에도 고사리 무늬가 조각되어 있답니다.
그리고 능선은 3단의 팔각형 곡선이 마치 받침과 같이 조성되었고 그 위로 보개를 얹었으며. 옥개석 아랫면에는 받침 없이 물끊기홈인 절수구(切水溝)만 표현되어있고요.
상륜부는 보개만 남아있는데 옥개석을 축소해 놓은 모양위에 새로 만들은 보주를 얹었는데, 연판은 8엽으로 조각되어 있답니다.
좀 어려운 용어가 많이 나옵니다.
'삼산입상형의 귀꽃' 여덟개의 처마 끝에 위로 삐쳐 올린 부분을 지칭하는 것이고, '물끊기홈인 절수구'는 아래 부분의 세로줄이 있는 하단면에 빙둘러가며 홈이 파인 부분인데 이것은 등불을 넣어두는 화사석으로 빗물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는 것으로, 요즘의 아파트 발코니나 주방창 등에도 빗물의 유입를 위해 적용하는 시공법인데 900년전에도 이것을 적용했다니 참 놀랍습니다.



<나주서문석등-화사석>
석등의 핵심부분인 화사석입니다.
문화재청의 안내문을 보면 "화사석은 새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 창이 4개다."라고 되어있습니다.
머리돌 보개위에 얹혀있는 보주와 같이 1929년에 새로 만들어 끼워놓았다는데 핵심부분이 망실되어 아쥐운데, 이 부분의 색과 질감이 원래의 석재와 많이 다릅니다.
이 부분은 불을 밝혀두는 부분으로 팔각형으로 되어 있는데, 네 면에 화창(火窓)이 뚫려있고 나머지 네 면에는 화창은 없지만 마치 화창이 있는 것처럼 액을 조각한 수법으로 복원을 해놓았습니다.



<화사석의 명문: blog.naver.com/sunyoudo에서 빌려온 그림>
자료를 검색하다가 미쳐 현장에서 보지 못했던 부분의 사진을 하나 발견합니다.
위에 있는 사진으로 '선유도의 답사 이야기(blog.naver.com/sunyoudo)"라는 블로그에 이 석등 각 부분의 Detail을 담아 놓았는데, 그 중에 화사석의 어느 한 면의 모습입니다.
이 사진을 자세히 보면 한자로 된 명문이 보이는데, 잘 보이지 않지만 대략 "소화 4년 12월 전라남도 나주에 있던 것을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기면서 보주와 화사석을 어찌 어찌 했다. 조선총독부"라는 내용 같은데 아마도 옮길 때 보주와 화사석을 다시 해 넣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긴것 같습니다.
(우측에서 세번째 줄 하단은 補足x으로 보이는데 무슨 뜻인지?)
이런 detail까지 관찰하고 담아놓으신 선유도님의 내공에 찬사를 보냅니다.










<나주서문석등의 하부>
석등의 하부를 살펴보며 문화재청의 안내문을 읽어봅니다.
"네모난 모양의 널찍한 바닥돌 위에 세워져 있으며, 아래 받침돌은 8각이고 연꽃문양이 새겨져 있다. 기둥모양의 중간받침은 8면으로 각 면마다 테를 둘러 공간을 만들고 그 중심 안에 한 줄씩 문장을 새겼다. 이 명문에 의하면 고려 선종 10년(1903)의 작품임을 알수 있다. 위받침돌은 8각면에 돌아가며 연꽃무늬를 조각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 석등은 8각형 신라 석등의 모양을 본받았는데, 그 구조와 조각이 우수하여 고려시대 석등의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라는 평으로 맺음을 하였습니다.
다른 자료를 좀 더 찾아봅니다.
지대석의 앞면에는 세개의 안상(眼象)이 있는데 가운데에는 고사리무늬, 좌우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고 위쪽에는 높은 하단과 낮은 상단의 받침을 호형으로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하대석은 8엽의 복엽으로 처리된 연화대석위에 3단으로 받침을 하여 그위에 간주석(竿柱石)을 올렸는데, 그 간주석은 8각으로 각 모서리에 기둥(우주:隅柱)을 세웠으며 상, 하단에는 가로로 된 단대를 놓았고 각 면에는 1행씩의 다음과 같은 명문을 새겨놓았다고 합니다.
'南贍部州高麗國羅州/中興里□長羅左堅應/迪孫□先月心光□□心/聖壽天長百穀登/錦邑安泰富貴恒存/願以燈龕一坐石造排立/三世諸佛聖永獻供養/大安九年癸酉七月日謹記'
대충 "고려국 나주에 읍성의 안녕과 부귀를 위하여 불감 1좌를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에 공양하기 위해 대안 9년 계유년 7월에 조성하였다."라는 뜻이라는데 아 명문의 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된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간주석 위에는 상대석을 앉혔는데 아래에는 2단의 받침이 있고 그 위에 8판 복엽의 연꽃문양이 새겨있으며 그 위에 직각면의 띠를 둘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석등의 표준>
망실되어 새로 만들어 끼어 놓은 화사석의 모습을 추측하기 위해 "석등의 표준"을 검색하여 빌려다 올렸봅니다.
화사석에는 네개의 화창이 뚫어져 있고 나머지 네면에는 사천왕상을 새겨놓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새로 끼워 넣은 화사석에는 이것이 생략되어 있네요.
이왕에 새로 만들어 넣을 것이면 실력있는 장인을 시켜 본래의 문화재에는 미치지 못하더라고 최선을 다해서 복원을 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듭니다.
맨위에 올려 놓은 사진을 다시 살펴보면 무언가 눈에 거슬리지요?
간주석까지는 제대로 되었는데 화사석이 부터는 조금 기울어져 있는데 아마도 화사석의 밑 부분이 제대로 되지 않아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불교신문에 실린 '석등의 의미'를 읽고, 발췌하여 올려봅니다.
등을 밝히는 것을 연등이라 하고, 등불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밝히려 하는 것을 간등(看燈) 또는 관등(觀燈)이라 한다. 등공양은 반드시 등잔에 불을 붙여 부처님 전에 올려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지극한 신심으로 등불을 켜는 것만으로도 등공양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석등을 제작한 의도가 등불 공양에 있었음을 밝힌 명문(銘文)이 나주서문석등(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 발견된 바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이 석등에 70여자에 이르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그 중에 “삼세제불성영헌공양(三世諸佛聖永獻供養)”이라고 쓴 대목이 있다. “과거 현재 미래세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는 이 명문을 통해 석등이 부처님께 올리는 등공양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석등은 이처럼 공양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석등의 불빛 자체는 부처님이 발하는 지혜 광명의 상징으로 관념되고 있다. 등불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경에서는, “캄캄한 삼계(三界) 안에 범부의 굴택(窟宅) 번뇌에 헤매는 삼악도의 인(因)을 영원히 씻은 듯이 소멸하고 앞길을 밝게 비춰 준다(〈대방광불화엄경〉 40권본 제4권)”, “등불은 세간을 두루 비치고 모든 지혜의 광명을 내며 선지식은 일체지(一切智)에 나아가게 하며, 나로 하여금 옳고 그른 길을 분별케 한다(같은 경, 제8권)” 라고 하였다. 이처럼 등불은 모든 여래의 법과 일체의 미세한 색깔과 법신의 깨끗한 광명과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두루 비추고, 중생이 없는 세계를 알게 하고, 부처님의 법에서 물러나지 않게 한다.

석등’이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현존하는 유물과 몇몇 기록을 통해 명칭의 쓰임의 내력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신라 진성여왕 5년(891)에 건립된 담양 학선리의 개선사지석등의 명기(銘記)에 ‘건립석등(建立石燈)’이라는 말이 보이고, 고려 순종(선종의 오기?) 10년(1093)에 제작된 나주서문석등 명문에서는 ‘등감(燈龕)’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통해서 석등이라는 말과 함께 등감이라는 말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등의 기본형은 하대석(下臺石).중대석(中臺石, 또는 竿柱石).상대석(上臺石)을 기대(基臺)로 삼고, 그 위에 등불을 직접 넣는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을 얹으며, 정상부를 보주(寶珠) 등으로 장식하는 형식이다. 석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화사석이다. 직접 등불을 켜는 화사석은 8각, 4각이 대종을 이루고 있으며, 4개 또는 8개의 화창(火窓)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