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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둘러보기

보리사대경대사현기탑비-보물361호 그리고 이마니시

용산 중앙국립박물관 전시동 앞 뜰에 있는 석물 문화재 중에서 오늘은 보리사대경대사현기탑비를 둘러봅니다.
1916년에 작성된 총독부의 조사자료인 '고적조사보고'에 의하면 일본인 전문가인 '이마니시'가 보리사지를 조사한 내용이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이 보리사대경대사현기탑(이하 현기탑)이 밀반출된 경위와 이 보리사대경대사현기탑비(이하 현기탑비)가 서울로 옮겨오게 된 내력이 실려있다고 합니다.


<보물제361호 보리사대경대사현기탑비>
이 보고서에는 "현재 보리사터에는 현기탑비의 비신, 귀부, 이수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또한 마을사람(김선호)에 의하면 그 외에 현기탑이었을 석탑 하나는 수 년전까지 귀부와 가까운 지점에 있었는데 일본인이 서울로 운반해 갔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울러 "이미 서울 방면으로 반출된 현기탑을 색출해 내어 박물관에서 영구히 보존시키도록 할 것을 간절히 바람"이라는 의견까지 밝히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마니시는 위와 같이 이미 반출당한 현기탑에 대한 의견에 더하여 현지에 쓰러져 버림받고 있는 탑비라도 서울로 옮겨 와야 한다며 "이러한 천 년의 옛 비석이 선려(鮮麗)하게 유존됨은 경탄 할 일임. 국보로서 보존 시켜야 함. 그러나 현재의 위치에 보존 시키기는 어렵고 서울의 박물관에 옮겨서 보존되기를 간절히 바람."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그 후 총독부에서 이마니시의 의견을 받아들여 1915년 현기탑비를 서울로 옮겨 경복궁 안에 건립했던 총독부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에서 보호하도록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같은 일본 사람이지만 국적을 떠나 문화재를 사랑하고 보호하려는 이런분이 있는가 하면, 개xx라고 육두문자가 나오는 것을 입이 더러워질까봐 '일본넘'이라고 불리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보리사대경대사현기탑비 - 머리돌(이수螭首)>
안내판에 있는 이 현기탑비의 설명을 읽어봅니다.
<이 탑비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활동하던 성주산문의 대경대사 여엄(862~930)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대사가 입적한지 9년이 지난 고려 태조 22년(939)에 세워졌다. 거북 받침돌(귀부)의 머리가 용머리로 바뀌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탑비에서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머리돌(이수)의 구름과 용은 매우 생동감 있게 조각되었다.>
이수의 가운데에 무슨 명문이 새겨진것 같은데 잘 알아보지 못하겠습니다.

<보리사대경대사현기탑비-비문>
문화재청의 자료를 읽어봅니다.
비를 새운 시기는 고려 태조 22년(930)으로, 대사가 입적한 지 10년이 지난 후의 일이라고 되어 있는데 박물관의 안내서와는 1년이 틀립니다.
대경대사는 신라말 고려 초기의 고승으로, 9세에 출가하여 교종을 배웠으나, 나중에는 선(禪)을 연구하였고,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경순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고려태조는 그를 존중하여 보리사의 주지로 머물게 하였으며, 69세에 이 절에서 입적하니 태조는 시호를 "대경", 탑 이름을 "현기"라고 내려주었다고 하네요.
비문에는 대사의 생애, 공적 등이 새겨져 있는데, 당시의 문장가였던 최언위가 글을 짓고, 이환추가 글씨를 썼으며, 대사의 제자인 최문윤이 글씨를 새겼다고 하는데, 글씨에는 획의 모서리를 날카롭게 살린데서 오는 강인함이 묻어나는데, 고려 전기의 특징이 잘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보리사대경대사현기탑비-받침돌(귀부)>
이 탑비의 높이는 3.5m로 받침돌인 귀부는 보주를 물고 일어선 거북머리 모습인데 얇은 편이며, 비의 갓인 거대한 머리돌(이수)의 조형은 사실적이나 아랫 부분과의 비례가 잘 어울리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지만 머리돌에 새겨진 구름과 용의 무늬가 매우 힘차게 조각되어 눈여겨 볼만 하다고요.
박물관에 있는 안내문에는 받침돌(귀부)의 머리가 용이라고 되어 있는데 문화재청 자료에는 거북머리라고 하네요.



<보물제531호 보리사대경대사탑-이화여대박물관소장:문화재청자료>
그럼 이 탑비와 한쌍인 대경대사현기탑에 대해 잠시 알아봅니다.
위에 소개한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보고서"에 일본인들에 의해 이미 반출된 현기탑을 찾아야 한다고 '이마니시'의 보고에 따라 총독부는 경찰에 조사를 지시하였고 1917년 12월 경기도 경찰부장은 총독부 정보과장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네요.
"보리사터의 이중탑(위 사진은 얼핏보면 2층 석탑구조로 보임)은 절터의 논밭 임자인 함백용, 박영범, 박돈양 세사람이 이웃의 상원사에 기부를 하였는데 1909년 7월 일본인 세명이 상원사를 찾아와 비싼값에 팔라고 끈질지게 요구하자, 상원사의 주지인 '최화송'이 기증자인 3인과 협의하여 120원에 팔았고 넷이 나눠가졌다함.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고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고 하여, 조사를 한 결과 그 때 석탑을 어디로든지 반출할 수 있는 권한을 산 사람은 서울 본정(충무로) 2가 18에 사는 "다나카"와 약초정(초동)에 사는 "다카하시"란 고물상으로 밝혀졌음.
이들은 이 탑을 1911년 8월에 명치정(명동)2가에 사는 "시로로쿠"에게 500원에 팔았고 시로로쿠는 730원의 운반비를 들여 반출, 지금도 그가 보유하고 있음."
이렇게 명확히 이 석탑의 소재가 판명되었음에도 총독부는 압수, 매입 등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데, 그 후 여러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이 탑이 행방을 감추었다고 합니다.


<보리사대경대사현기탑비-경복궁에 있을때:문화재청자료>
1956년 이화여대 총장공관을 새로 지으며 조경을 위해 남산동 1가에 있는 일제 때 '닛타'라는 일본넘이 살던 집의 나무와 석물을 구입했는데 이 때 정원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이낀 낀 부도 한점도 묻어 들어왔다고 합니다.
이 이름없는 부도가 총장관저에 세워지자 관계자들의 이목을 끌어 중요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는데 (지금은 보물제351호) 전문가들의 감식결과, 이 부도가 1911년 일본넘들에 의해 보리사터에서 서울로 불법반출된 보리사터의 대경대사현기탑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나 확증은 잡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 보리사대경대사현기탑은 지금 이화여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 역사와 문화재를 왜곡, 말살하고 파괴하는데 앞장선 원흉이지만 이 부분만은 '이마니시'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註)참조: 이구열 저, 돌베개 출판 "한국문화재 수난사"현기답비의 비문입니다.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