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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둘러보기

국보104호 염거화상탑 (부도)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관 앞뜰에 놓여 있는 국보제104호 염거화상 승탑(부도)을 둘러봅니다.

 

<염거화상 탑>
먼저 이 승탑의 앞에 있는 안내문을 읽어봅니다.
이 승탑은 탑지(塔誌)가 함께 전해져, 승탑의 주인공과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라고 합니다.
신라 문성와 6년(844)에 선종 산문의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대 선사인 염거화상(?~844)을 위해 만들었는데, 팔각집의 모양에 사천왕 등의 부조상을 새긴 전형적인 승탑의 모습이라고요.
이후 승탑들은 이 승탑을 따라 대부분 팔각구조에 화려한 부조상을 새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부도의 구조>
부도의 근원을 살펴보면 구산선문의 첫째인 가지산문의 제1조 도의선사 부도가 효시라고 합니다.
도의선사는 748년 당나라로 건너가 35년간 달마대사로 부터 이어져온 선종인 홍주종의 9대조인 서당지장에게 불법을 전수받고 821년 귀국을 하였고, 지금까지 왕권불교 즉 왕즉불(王卽佛:왕이 곧 부처)의 엄격한 체계하에 "타고난 마음이 곧 부처(自心卽佛)"를 외치며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을 최초로 전파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아주 불순한 사상으로 기득권층의 배척을 받았답니다.
이에 도의 선사는 멀리 설악산에 있는 진전사에 들어갔으나 많은 일반 대중과 지방의 호족들이 찾아와 선사의 가르침을 받아 선종을 널리 퍼트리게 되었고 지방 호족이던 왕건이 승리하여 고려를 건국하자 선종이 확고한 지위에 오르게 되었답니다.
지금까지는 고승이 죽으면 화엄세계속에서 그것으로 끝났지만, 선사가 명을 거두자 "타고난 마음이 곧 부처"이고 그것을 깨달은 사람 또한 부처이니 선사 또한 부처로, 석가모니의 사리를 탑에 모시는 것 처럼 선사의 사리도 진전사 뒤산에 부도를 세우고 안치를 한 것이 우리나라 부도의 효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도의선사 부도는 8각당을 기본으로 하고 그 받침대는 석탑의 기단부를 그대로 따랐는데, 도의선사의 뒤를 이은 가지산문의 제2조 염거화상의 부도에 이르러서는 장고 형태인 연꽃받침대에 8각당을 얹은 전형적인 부도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염거화상탑'이 되겠습니다.
염거화상의 뒤를 이어받은 제3조인 보조체징은 장흥 가지산에 보림사를 세우고 여기에서 선종의 법을 전하니 구산선문의 맨 앞에 나오는 가지산문이 되었다 합니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 1>
검색을 하여 승탑(부도)의 구조에 대한 자료를 찾아봅니다.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하는 묘탑으로 부도(浮圖), 부두浮頭), 불도(佛圖) 등으로도 부르는데 원래는 불타(佛陀 Buddha) 또는 솔도파(率堵婆 Stupa)에서 유래하였으며 불상, 불탑을 지칭하다가 고승들의 사리를 담는 석조 소탑을 지칭하게 되었답니다.
불탑의 구조는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염거화상탑 이후로 팔각형으로 된 팔각원당형이 우리나라 부도의 주된 형식으로 자리를 잡았다네요.
옥개석은 목조건축물의 기왓골 양식이며 기단이난 탑신부에는 불, 보살, 신장, 비천, 사자 등을 새겨놨다고 합니다.

 

 
<염거화사탑 옥개석>
이 염거화상탑은 현재 남아 있는 승탑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하는데 1914년에 탑골공원으로 옮겨졌으며 원래의 위치를 원주에 있는 흥법사지(興法寺址)라고 하였지만 일본인들의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어 그 앞에 전(傳)을 붙여 전흥법사지(傳興法寺址) 염거화상탑으로 부른답니다.
광복 후에 경복궁으로 옮겼는데 경복궁의 중건공사로 다시 경복궁에 있었던 국립중앙박물관의 뜰로 옮겼다가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되면서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옥개석의 지붕에는 기왓골이 아주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그 처마 밑에는 비천상이 새겨져있다고 하는데 안목이 없어서인지 확인이 잘 되지 않습니다.
옥개석 위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구조부는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망실된 것으로 보입니다.

 

 
<염거화상탑 탑신부와 괴임석>
탑신은 부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인데 각면에는 기둥을 세우고 전후면에는 문짝을 모각하여 내면에 자물쇠와 문고리 두개를 양각하였으며, 상부에는 양쪽에 굴곡이 있는 호형의 화문으로 장식하였답니다.
그 문짝모형의 좌우네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는데 각 상은 원형 두광과 무기, 갑주, 머리모양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탑신과 상대석 사이에 끼어넣은 괴임석의 각 면에는 에는 안상(眼象)을 음각하고 그 안에 연화좌위에 앉아 있는 천부상(天部象)을 새겨 놓았다고요.

 

 
<염거화상탑 기단부>
기단부는 상, 중, 하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대석의 각 면에는 돋을새김을 한 사자상이 있는데 그 형태가 모두 다르게 되어 있고, 중대석의 각 면에는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이라는 안상을 음각하고 그 안에 향로 등의 여러가지 문양을 조각되어 있답니다.
상대석의 하부에는 하대석의 상부와 대칭을 이루는 삼단각형 받침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는 연꽃잎무늬가 양각되어 있습니다.
승탑의 조각에 형식과 조각에 대하여 찾아보았는데 실제로 안목이 없는 내가 보기에는 위에 설명한 조각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네요.
가까이 봐도 그렇게 멀리서 봐도 그렇고, 다만 이렇게 설명을 보고는 '아, 저게 사자모양인가 보다'라고 생각을 하지만 지붕밑의 비천상의 경우에는 전혀 인식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염거화상탑>

이 탑은 높이 1.7m의 화강석으로 되어 있는데 이 탑을 서울로 옮길 때 금동제(金銅製) 탑지(塔誌)가 발견되었고 그 안에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회창4년(문성왕6년-844)이라는 년호가 있으며 또한 '탑(塔)'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금동제탑지는 일반인의 묘지(墓誌)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서체의 쌍구문자로 쓰였다고 하는데 쌍구문자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염거화상은 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가지산문의 제2대 조사로 도의국사의 법을 이어받았으며 도의국사가 진전사라는 곳에서 입적할 때 염거화상에게 전심(傳心)하여 선을 널리 펼칠 것을 당부하였는데 그는 주로 설악산 억성사에서 머물면서 선법의 포교에 임썼고 체징에게 법맥을 전수 시키고 입적을 하였다고 합니다.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