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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둘러보기

국보 147호 천전리각석(061029)

2006년 10월 29일, 밀린 일들을 정리하고 나니 좀 시간이 나서 늦으막하게 언양의 가지산으로 향합니다.
석남사 입구 주차장이 꽉 차서 이리 저리 돌다가 겨우 사설주차장에 주차를 시키고 나니 벌써 오후 2시인데 빨리 뛰어도 한바퀴 돌기에는 조금 늦은 산행입니다.
지난번에 구름과 안개가 많이 끼어서 제대로 이 산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욕심을 내어 해드랜턴을 확인하고는 부지런히 산을 오릅니다.
그런데 밀양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터널쪽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지점에서 통화를 하려고 주머니를 뒤져보니 전화기가 없네요.
주차를 시키고 신발을 바꿔 신으면서 놓고 온 것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뿐만 아니라 차를 잠그지 않은 것 같고요.
다른 것이야 없어져도 상관없지만 노트북과 하드디스크에 있는 자료가 없어지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여 서둘러 하산을 하여 주차장에 와보니 전화기는 신발을 갈아신은 바위 옆에 놓여 있고 차도 잠겨있지는 않지만 손댄 흔적이 없어 잠시라도 염려를 하였던 마음이 부끄러워 혼자 얼굴을 붉힙니다.
산행은 틀렸지만 지난번부터 한 번 가보려고 생각했던 천전리각석과 반구대를 둘러보기로 합니다.
<국보147호 천전리각석 안내판>
<국보147호 천전리각석과 안내원>
천전리에 도착하여 각석이 있는 곳에 도착하니 나이 지긋한 안내원이 나무지팡이로 각석의 여기저기를 가르키고 두두리며 관람객들에게 설명을 하는데 술을 한잔 하셨는지 말투가 상당히 거칠고, 일부러 그러는 지 육두문자까지 동원합니다.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인데 비록 안내원이지만 각석을 나무지팡이로 툭툭치면서 설명하는 것이 아주 눈에 거슬립니다.

 

 

<국보 147호 천전리각석 전경>

 

안내원과 관람객들 때문에 사진을 담기가 어렵습니다.
안내문이 있는 입구쪽으로 다시 나와 각석의 반대쪽 냇물가(공룡발자국화석이 있는곳)로 돌아가니 마침 각석 앞에는 관광객이나 안내원등의 장애물이 없어 줌잉하여 전경사진을 담아봅니다.
천전리각석 옆에는 방명록과 각석의 안내문이 있어 읽어보지만 별 내용이 없어 여기 저기 검색을 해보니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의 Site에 아주 좋은 자료가 올라있어 읽어옵니다.

 

천전리각석은 1970. 12월 문명대를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불적조사단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며, 1973. 5. 4 일 국보147호로 지정되어 보존되었답니다.
천전리각석이 위치한 이곳은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의 중간쯤에 위치하여 선사시대뿐만 아니라 신라 화랑들의 수양 터로 각광받았던 절경인데 특히, 조선시대에는 이 지방에서 가장 이름난 명승지로 알려져 시인 객(詩人 客)이나 원근관원(遠近官員)들의 풍류지로 석벽(石壁)에는 그들의 시·명명(名銘)이 무수하며, 이름있는 화가들도 이 경치를 화폭에 담았다고 합니다.

 

명문 자료 가운데 매우 단편적인 기록들이 판석의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데 이를 유형별로 구분해보면 먼저 간지가 기록된 것, 인명만 나열한 것, 마멸이 심하여 글자를 판독하기 곤란한 것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답니다. 간지가 기록된 명문 가운데는 ‘간지+재(載)’라고 표기한 것이 보이는데, 744년에서 758년 사이에 연(年) 대신 재로 표기하였으므로 이런 사례는 절대 연대를 파악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 된다고 하고 또 인명만 나열한 명문 가운데는 화랑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판석의 무늬 – 안내원과 관람객들을 비집고 담았습니다.>

 

판석의 위쪽은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등이 조각되어 있으며,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으며, 기마행렬도, 동물, 용등 다양한 내용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상단과 하단부분의 그림을 그린 부류가 서로 다름을 의미한다고요.

 

<판석의 명문-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명문인데 아래의 사진자료르 보니 기미명과 을사명입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 이해되며,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여러 시대의 생활모습을 다양하게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유적이라고 합니다.
이 암벽은 15도 앞으로 비스듬히 서 있어 직접적인 풍화작용을 받지 않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으며 강바닥 보다는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보통 때는 물과 상관 없지만 큰 홍수가 있을 때는 반 정도 물에 잠길 때도 있답니다.
계속해서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ite에 있는 판석의 글자 몇 가지의 사진과 번역해 놓은 자료를 인용해봅니다.

 

<을사명>

 

을사년(乙巳年)사훼부(沙喙部)갈문왕(葛文王)찾아 놀러와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 고곡(古谷 : 오래된 골짜기)인데, 이름없는 골짜기이므로,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짓고, (말미암아) 서석곡(書石谷)으로 이름을 삼아 글자를 만들었다(銘文을 새겼다). 더불어 놀러온 이는 (갈문왕과) 우매(友妹)[사랑하는 누이]여덕광묘(麗德光妙)한 어사추안랑(於史鄒安郞) 셋이다.
식다살작공인(食多煞作功人)(행차(行次)의 준비인(準備人)은 이리부지(尒利夫智) 대나마(大奈麻)와 실득사지(悉淂斯智) 대사제지(大舍帝智)이며, 작식인(作食人)은 영지지(榮知智) 일길간지(一吉干支)아내 거지시해부인(居知尸奚夫人)과 진육지(眞宍智) 사간지(沙干支)의 아내 아혜모홍부인(阿兮牟弘夫人)이고, 작서인(作書人)모모이지(慕慕尒智) 대사제지(大舍帝智)이다.

 

<기미명>

지난 을사년(乙巳年) 6월 18일 새벽[昧]사훼부(沙喙部)사부지갈문왕(徙夫知葛文王)매(妹)어사추안랑(於史鄒安郞) 3인(三人)이 함께 놀러 온 이후 □년(□年)이 (지나갔다). 八巳年過去妹王考妹王過人(해석 미상). 정사년(丁(?)巳年)에 왕(王)은 과거(過去)의 왕비(王妃) 지몰시혜비(只沒尸兮妃)를 사랑하여 스스로 생각했다.
기미년(己未年) 7월(七月) 3일(三日)에 그 왕(王)매(妹)와 더불어 함께 서석(書石)을 보러 계곡으로 왔다. 이 때 함께 셋이 왔는데, 영즉지태왕비(另卽知太王妃) 부걸지비(夫乞支妃)사부지왕자랑(徙夫知王子郞)과 심□부지(深(?)□夫知)가 함께 왔다. 이 때 □작공신(□作功臣)훼부(喙部) 지례부지(知礼夫知) 사간지(沙干支)와 □박육지(□泊六知) 거벌간지(居伐干支)이며, 예신(禮臣)은 정을이지(丁乙尒知) 나마(奈麻)이다. 작식인(作食人)은 진육지(眞宍知) 파진간지(波珍干支)의 아내인 아혜모호부인(阿兮牟呼夫人)과 이부지(尒夫知) 거벌간지(居伐干支)의 아내인 일리등차부인(一利等次夫人)과 거례차(居礼次) □간지(□干支)의 아내인 사효공부인(沙爻功夫人)으로 나누어 함께 지었다.

 

<계사명>

 

계사년(癸巳年) 6월 22일 … 사훼부(沙喙部)일분(壹奮)왕부(王夫)나마(奈麻?)배중(輩衆) 대등(大等)부서인(部書人) 소(小) … 사(思?)성(聖?) … 추□□□(鄒□□□)이 왔다. … 이□지(尒□知) 대형가(大兄加) … 두독지(豆篤知) 대형□(大兄□) … 궁두설(宮頭舌) … 형잠□(兄岑□) …
<을묘명>

 

을묘년(乙卯年) 8월 4일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 도인(道人) 비구승(比丘僧) 안급이(安及以)와 사미승(沙彌僧) 수내지(首乃至), 거지벌촌(居智伐村)중사(衆士) □인(□人)들이 (서석곡을) 보고 쓰다.

 

<을축명>

 

을축년(乙丑年) 9월에 사훼부(沙喙部)우서□부지(于西□夫智) 비진간지(淝珍干支)아내부인(夫人) 아도랑(阿刀郞)과 딸[女]이 곡(谷)을 보러 올 때, 앞에 선 사람은 … (이하 불명)
<계해명>

 

계해년(癸亥年) 2월 8일 사훼부(沙喙部)의 □릉지(□凌智) 소사(小舍)아내인 비덕도(非德刀)가 놀러 왔을 때 쓰다.
그 외에 사진은 실리지 않았지만 아래와 같은 번역문도 있습니다.
甲寅大王寺中
安藏 許作
갑인년(甲寅年)대왕사(大王寺)안장(安藏)이 짓다.
上元二年乙亥三月□日加具見之也大阿干□八戌待」
상원(上元) 2년 을해(乙亥) 3월 □일(□日) 가구견지야(加具見之也) 대아간(大阿干)... (이하 미상)
上元四年十月四日夫米坪宅猪鳥」
상원(上元) 4년(四年) 10월(十月) 4일(四日) 부미평택(夫米坪宅) 猪烏
開成三年戊午
三月一日文巖見
□化□耒之
개성(開成) 3년 무오(戊午) 3월 1일에 문암(文巖)을 보고... (이하 미상)
여기까지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의 사이트에 있는 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 국보 147호 천전리각석 전경-냇물 건너편에서>

 

각석 반대쪽 냇물가에서 담은 천전리각석의 원경입니다.
옆에 있는 이정표에 2~3Km(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음)정도 가면 반구대암각화가 있는 곳이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내물을 따라 가는 산길인가 봅니다.
저 길을 따라 가는 것도 좋으련만 시간 여유가 없어 차를 돌려 반구대암각화가 있는 쪽으로 향합니다.
<다음은 국보 147호 천전리각석에 대한 문화재청의 안내문입니다.
태화강 물줄기인 내곡천 중류의 기슭 암벽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이다. 아래 ·위 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각이 가득하다.
윗단에는 쪼아 무늬를 만든 후 다시 나무나 돌로 간 쪼아갈기 기법으로 조각한 것으로 사물을 개념화시킨 추상적 기하학양식을 보여주는 선사시대의 최대 유적으로 기하학적무늬, 동물, 추상화된 인물등이 조각되어 있다.
사실성이 떨어지는 단순화된 형태인데 중앙부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 원을 중심으로, 양 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과 맨 왼쪽의 반인반수(半人半獸:머리는 사람, 몸은 동물인 형상)상이 눈에 띈다. 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을 갖고 있는 듯한 이 그림들은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는데, 기마행렬도, 동물, 용, 배를 그린 그림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기마행렬도는 세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간략한 점과 선만으로도 그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배그림은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글자는 800자가 넘는데 왕과 왕비가 이 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 법흥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중에는 관직명이나 6부체제에 관한 언급이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 사상 등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어느 특정 시대를 대표한다기보다 여러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