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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돌이

서계 박세당 선생 고택(060124)

2006년 1월 24일, 장암역에서 내려 수락산으로 올라가다가 잠시 짬을 내어 수락산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인 서계 박세당 선생의 고택으로 향합니다.
날씨가 조금 풀렸다고 하지만 간간히 불어오는 칼바람은 옷깃을 여미게 하네요.
몇 번 찾아 왔었지만 고택 입구에 있는 일반인 출입금지 표식을 보고 그냥 발길을 돌리곤 했는데 오늘은 들어가 고택을 둘러보려고 합니다.

<서계 박세당 고택 입구>
입구를 들어서 정면 우측에 있는 고택의 원경을 담고 왼쪽에 있는 살림집으로 향하자 여기 저기에서 개들이 짖기 시작합니다.
그 중 두 녀석이 내게로 쫓아와 적의를 드러내며 짖어 대어 손을 내밀어 적의가 없음을 표하니까 꼬리를 약간 흔들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으르렁 거리며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습니다.
살림집으로 보이는 곳으로 가자 그 쪽에 묶어 놓은 개들이 더욱 심하게 짖어대고, 그 소리에 중년 부인 한 분이 나오시면서 개들에게 짖지 말라고 나무라는데, 아마도 서계종택의 종부되시는 분 같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종택 사랑채를 둘러보러 왔다고 말씀을 드리니, 추운 날씨인데도 싫은 표정이 없이 앞장서서 고택 쪽으로 안내를 하십니다.


<서계 박세당 고택 원경>
종택 사랑채에는 들어서니 서계선생의 11대 종손이신 할아버지(박찬호 옹)께서 마루에 앉아 계십니다.
할아버지께 사랑채를 둘러보고 사진을 좀 담으려고 왔다고 말씀을 드리니 흔쾌히 수락하시는데, 영당은 열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주변을 둘러보고 사진을 몇 컷 담고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해 말씀을 들어봅니다.
서계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서계선생의 유적과 유물을 발굴 보존, 복원하고 또한 그 분의 학문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연구, 계승 발전을 하려고 하지만 여건이 그리 여의치가 않다고 하십니다.
문득 쇄락해 허물어져 가는 ‘궤산정’의 지붕이 떠올라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는데 관할 관청의 지원은 제대로 되고 있느냐고 여쭤보자 입가에 옅은 미소만 띄우고 말씀이 없으시지만, 먼산을 바라보는 눈빛에 담겨있는 뜻은 바로 전달이 됩니다.

<서계 박세당 고택 사랑채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93호>
지난번에 서계선생에 대한 검색을 하다가 이곳을 취재한 어느 기자가 “영당에 있는 서계선생의 영정을 보고, 안내해 주던 83세의 11대 종손과 똑 같은 모습에 깜짝 놀랐다.”고 쓴 것을 보았는데 <고단하고 쓸쓸하게 살아 세상사에 합하지는 못할지언정, ‘맹자’에서 이른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고, 세상 사람들 좋은 대로 하는 무리들”에게 끝내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낮추려 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는 서계선생의 “자찬묘표(自撰墓表)”의 뜻까지 닮으신 것은 아닌지?
조상님들이 대를 물려 내려주신 종택을 다 지키지 못했으나 한국동란을 겪으면서 이나마 사랑채라도 보존시킨 것이 다행이라고 말끝을 흐리십니다.

<서계 박세당 고택 사랑채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93호>
들어오면서 영당 위에 있는 야산에 선영이 있는 것 같아 거기도 둘러 보았으며 하고 말씀을 드리니 그러라고 하시면서 ‘누가 뭐라고 하면 나에게 얘기를 했다.’고 하면 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추운 겨울날, 나이 많으신 어른을 너무 성가시게 하는 것 같아 인사를 드리고 대문을 나서면서 할아버지께서 오래 오래 사시라고 기원을 합니다.

<영진각-서계선생의 영정을 모셔놓은 곳>
서계선생의 영당의 출입문인데 잠겨져 있습니다.
서계문화재단 게시판에 실려있는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몸소 지으셨다는 묘표를 읽어봅니다.
-서계자찬묘표-
서계초수는 네 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여덟 살에 왜구의 침략을 받아 외롭고 가난하여 학문할 때를 놓쳤다. 10여세가 되어 비로소 중형에게서 수업을 하였으나 또한 스스로 힘쓰지 않았다. 현종이 등극한 해 서른 둘의 나이로 과거에 올라 벼슬을 시작하였다. 8-9년을 해보니, 재주와 힘이 모자라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또 세상사도 나날이 허물어져 바로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이에 벼슬을 버리고 떠나 동대문밖에 살게 되었다.
도성에서 30리 떨어진 수락산 서쪽 골짜기다. 그 골짜기 이름을 석천동이라 하고, 인하여 스스로 서계초수라 하였다. 개울에 임하여 집을 짓고 울타리도 치지 않았다.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배나무, 밤나무를 심어 집을 빙 두르게 하였다. 오이를 심고 밭을 일구었다. 땔감을 팔아 생계를 꾸렸다. 농사철이 되면 직접 밭두둑에 나가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호미와 가래를 둘러맨 이들과 어울려 따라 다녔다.



<영진각>
영진각은 서계선생의 영정을 모셔놓은 곳 같은데 개방이 되지 않아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였고요.
계속하여 서계자찬묘표를 읽어봅니다.
-서계자찬묘표-
처음에는 조정에서 불러 나아갔으나 나중에는 여러 번 불러도 가지 않았다. 30여 년을 살고 죽었다. 수명은 일흔이다. 그 살던 집 뒷 쪽 100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장사를 지냈다.
일찌기 통설을 지어 시경과 서경, 사서의 뜻을 밝혔고, 노자와 장자 두 책에 주석을 달아 뜻을 보였다.
특히 맹자의 말을 좋아하여 고단하고 쓸쓸하게 살아 세상사에 합하지는 못할지언정, <맹자>에서 이른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이 세상 사람 하는 대로 하고 세상 사람들 좋은 대로 하는 무리들"에게 끝내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낮추려 하지 않았다. 이는 그 뜻이 이러한 것이다.
(註)초수: 늙은 나무꾼
위에서도 인용했지만 마지막 구절 "~무리들에게 끝내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낮추려 하지 않았다"라는 구절이 선생께서 평생 지켜온 지조를 함축해 놓은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서계선생의 초상과 묘소>
검색을 하여 선생의 영정과 묘소를 빌려다 올려 놓았습니다.
위에 어느 기자가 표현했다고 했지만 이렇게 영정을 놓고 보니 11대 종손 되시는 분과 이 영정이 많이 닮았습니다.
사랑채에서 말씀드리고 그 분의 사진을 한 컷 찍었지만 왠지 이런 곳에 올리기가 죄송스러워 올리지 않았고요.
서계자천묘표의 원문입니다.
<西溪自撰墓表>
樵叟姓朴。世堂其名也。其先兩世貞憲,忠肅。並顯於仁祖之世。叟生四歲而忠肅公棄背。八歲而遭寇難。孤貧失學。及十餘歲。始受業於其仲兄。亦不自力。年三十二。當顯宗初元。用科第登仕。列侍從八九年矣。自見才力短弱。不足有爲於世。世又日頹。不可以救正也。乃解官去。退居東門之外。去都郭三十里水落山西谷中。名其谷石泉洞。因自稱西溪樵叟。臨水爲屋。不治籬樊。植以桃杏梨栗繞其居。種爪開稻畦。賣樵爲生。當農月。身未嘗不在田間。與荷鋤負耒者相隨行。初亦間赴朝命。後屢召不起。居三十餘年而終。壽踰七十。葬於其所居宅後百數十步。嘗著通說。明詩書四子之指及註老莊二書以見意。蓋深悅孟子之言。以爲寧踽踽涼涼無所合以八。終不肯低首下心於生斯世爲斯世。善斯可矣者。此其志然也。


<선영>
뒷산에 있는 선영에는 네 구의 묘소가 보이는데 맨 위에 있는 묘소는 서계선생의 손자인 박필기 공을 비롯한 박사심, 박헌원 등 선생의 후손 묘소인데 서계선생의 묘소는 보이지 않는데 아마 이곳이 아닌 모양이네요..
선생의 묘소 위치를 할아버지께 여쭤보지 않고 여기려니 지레짐작으로 올라온 자신을 탓하며 묘소와 아래로 보이는 사랑채와 영당을 카메라에 담고 궤산정이 있는 개울가로 내려갑니다.

<궤산정>
선영에서 내려오니 개울가와 선영사이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지만 너무 오래되고 낡아서 철조망의 구실을 못합니다.
선영에서 내려오면서 보이는 궤산정의 모습입니다.
궤산정은 태산을 쌓는데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완성치 못하였다는 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라는데 아마도 후학들에게 끝맺음의 중요성을 알려주려고 이런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저쪽 도로에서는 출입구와 정자의 현판이 보이지 않았는데 선영쪽에서 보이는 것을 보니 이쪽이 정면이었나 봅니다.


<석천동 전경>
석천동계곡의 모습입니다.
오른쪽 위 부분이 도로인데 계곡의 출입을 막는 철망이 쳐져 있습니다만 지난 가을에 보니 정자(궤산정) 바로 위에서 부터 음식점들의 좌대와 포장이 계곡을 꽉 채우고 있어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아니면 단속을 해서 그런지 개울 주변이 깔끔합니다.
쇄락한 궤산정을 둘러보고 주변의 바위글씨를 살펴봅니다.
궤산정이 앉아 있는 바위에는 ‘석천동(石泉洞)’ 석자가, 그 앞 넓은 바위 위에는 ‘서계유거(西溪幽居)그리고 우측의 넓은 바위의 앞면에는 취승대(聚勝臺)라고 암각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바위글씨-석천동>
서계선생은 바로 계곡 바로 좌측에 터를 잡고 계셨는데 집에 있는 우물의 이름을 "바위에서 솟아 나는 샘"이라는 의미로 '석천(石泉)'이라고 짖고 그 옆의 계곡을 석천동이라고 명명을 하셨다고 합니다.
정자가 앉아 있는 바위면에 새긴 '石泉洞' 석자의 모습이 아주 단정합니다.

<서계유거>
궤산정 정자 앞의 넓은 바위 윗면에 '서계유거'라는 글씨가 있는데 석천동의 글자와는 다르게 감이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힘이 넘쳐 보입니다.
여기에 은거하면서도 때때로 넘쳐나는 기운을 다스리면서 글을 쓰신것은 아닌지?


<취승대>
맨 우측의 넓직한 바위의 앞면에는 취승대(聚勝臺)의 석자가 새겨있는데, 정자 밑의 돌에 새겨진 석천동과 같은 글씨체로 단정한 모습입니다.
농사를 짖고 후학을 가르치고 일과 후에는 이곳에서 주변 경관을 누리신 모양입니다.
어느곳에 보니까 이 취승대는 동서남북 4대로 되어 있다고 되어 있는데... 어떤걸 가르키는지?
서계선생은 정치적으로는 집권세력인 우암 송시열 선생을 추종하는 노론들의 감시와 탄압을 받으면서 이 곳에서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농사를 짖고 후학들을 기르면서 저술활동을 하였지만, 끝내는 이경석에 대한 우암 선생의 잘못된 태도를 비판하는 글로 인하여 노론들에게 미움을 받고, 결국 이와는 상관도 없고 아무 잘못도 없는 ‘사변록’을 트집 잡혀 병든 노구에 삼베옷을 입고 동문 앞에서 석고대죄를 하는 수모를 당했다고 합니다.
노론들이 서계선생을 탄압하는 꼬투리로 삼았던 "이경석 신도비"에 관련된 글이 있어 여기에 링크를 시켰습니다.


<수락동천>
매월당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청풍정 앞 계곡에 있는 넓직한 바위에는 웅혼한 필치로 호쾌하게 새겨놓은 '수락동천(水落洞天)'이라는 큰 암각문이 있습니다.
서계선생이 이곳에 은거를 하자 선생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왕래하였는데 그중에도 처남인 '남구만'이 자주 찾아와 이곳에서 서계선생과 이 곳에서 대담을 많이 나눴다고 합니다. 그 남구만의 글씨라고 합니다.<"끝내 세상에 굽히지 않았다."에서>
어느 곳에는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 머물 때 새기글이라고 하기도 하고요.
경일일보의 기획기사에 실렸던 기사를 보면 '양사언'의 글씨라고 되어 있는데 글자에 이름이 없으니......
하지만 서계선생과 연관시켜 보면 '남구만'일 개연성이 가장 큰 것 같습니다.
가정적으로는 선생은 아버지와 형님을 일찍 보내고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어렵고 고단했던 어린 시절을 지낸 뒤, 남구만의 누이를 맞아 장가를 들고 처가에서 가정을 꾸려서 두아들을 두었다고 합니다.
그 후 장원급제를 하였고 따로 살림을 내었으나 바로 두 아들을 남겨 두고 부인은 명을 달리했고, 안경진체의 대가인 큰 아들 ‘태유’가 앞서 죽었으며, 서계선생에 이어 부자 장원급제를 하여 주변의 촉망을 받았으나 인현왕후의 폐비불가를 주장하던 둘째 아들 ‘태보’ 마저 먼저 보냈으며, 나이 오십에 들어서는 두째 부인마저 먼저 세상을 뜨는 등 아주 불우하였던 것 같습니다.
선생은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몸소 묘표(墓表)를 지었고, 임종 시에 당시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상식(上食:죽은이의 상청 궤연에 탈상 전까지 올리는 음식)을 올리지 말라는 유언을 하여 실학자 다운 면모를 보였는데 이 또한 예(禮)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노론들의 지탄을 받았다고 합니다.
선생 스스로 지었다는 모표(模表)의 번역문을 다시 읽어보면서 선생의 지성, 인품과 지조 그리고 실사구시의 실천정신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청풍정 터>
이곳을 둘러 보느라니 서계선생이 당쟁에 물든 관직을 버리고 이 곳에 들어와 이 계곡을 ‘석천동’이라 명명하고, 후학을 가르치고 농사를 지으며, 세속을 벗어나 자연을 즐기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또한 매월당 김시습의 절개를 흠모하여 그의 호인 수락산의 동봉(東峯:기차바위 봉우리)에 대하여 당신이 있는 수락산 서쪽 계곡을 나타내는 서계(西溪)를 호로 하고, 매월당을 기리는 석림암(지금의 석림사)을 건립토록 하였으며, 아울러 매월당의 모시는 충렬사(忠烈祠:지금의 노강서원자리)와 청풍정(淸風亭)을 지어 후학들에게 강론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청풍정 자리에는 주촛돌만 남아있어 이를 보니 세월은 그만큼 흘러 서계선생이 300년전 사람임을 일깨워줍니다.
서계선생이 매월당을 생각하며 지었다는 칠언율시 동봉(東峯)을 찾아서 올려봅니다.
<東峰>
東峰己無舊精舍 / 道人風流誰繼者 / 西溪老翁住溪畔 / 獨愛東峰行坐看 / 道人道超隨夷前 / 凡僧俗士不好事 / 道人遺蹟今莫記 / 寂寞空岩今久倚 / 東峰月照西溪水
동쪽 봉우리에는 이미 옛 정사가 없어졌지만/ 도인의 풍류를 누가 아니 이어 받을꼬
서계 노옹은 시냇가에 머물며 / 홀로 사랑하는 동쪽 봉우리로 나가 앉아 보노라니 동쪽 봉우리 높이 걸린 은하수 곁에는 / 도인의 뛰어난 도가 평평한 곳을 따라 앞서는 구나 / 무릇 승려나 세속의 선비들이 좋아하지 않는 일이나 / 도인의 남은 자취 이제 기록이 없고 / 적막하고 쓸쓸한 바위에 기대 오랫동안 그 아름다움을 읊는데 / 동쪽 봉우리에 뜬 달 서쪽 시냇물을 비추는구나.
마지막의 "동쪽봉우리에 뜬 달 서쪽시내를 비추는구나(東峰月照西溪水)"에서 매월당 김시습에 대한 선생의 흠모가 흠뻑 묻어 나오고 있습니다.
발길을 서둘러 수락산을 향해 올라갑니다.
오늘은 기차바위를 거쳐 주봉의 창문바위로 갈까합니다.
"동봉"이라는 기차바위 봉우리에 올라 칠언율시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느껴볼까 하고요.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