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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돌이

여주 신륵사 (051203)

2005년 12월 3일, 남한강가 매운탕집에서 나와 슬슬 걸어서 신륵사로 갑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문헌이 없어 정확한 년대는 알지 못한답니다.
전설에는, 어느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 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고 이에 원효대사가 7일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수 있게 되었다고요.



<일주문>
신륵사의 입구에는 일주문이 높직하게 자리를 하고 있는데 주변과는 어우러지지 못하는 모습이네요.
또한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 고려 우왕 때 부근의 마암 馬岩 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 龍馬 가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히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건너 마을에 사나운 용마가 나타났는데 이를 제압하지 못했는데 인당대사 印塘大師 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지자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 神力 의 신" 神 " 과 제압의 뜻인 륵" 勒 "을 합쳐 신륵사 "神勒寺"라고 하였다는 것이랍니다.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28호-신륵사극락보전>
극락보전은 전면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건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28호로 지정되었답니다.
세종22년 (1440년)에 중수를 거쳐 영릉의 원찰이 된 후 극락보전이라 명명하고 성종 4년(1473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정조21(1797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하였다고요.
극락전의 벽면에는 불화가 빼꼼하게 그려져 있는데 아는게 없어서 그 의미는 모르겠고요.

<보물제225호-신륵사다층석탑>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라네요.
이 탑은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이 돌려 새겨져 있으며,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하였고 또한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답니다.
아울러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능숙한 솜씨로 용무늬를 깊이 팠으며,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고,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렸으며,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고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답니다.
조선 성종 3년(1472)에 새 단장을 하였을 때에 이 탑도 함께 세워진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의 설명을 읽어도 이쪽에 아는것이 없어 이거이 무슨 뜻인지 감이 잘 안네요.



<범종각>
고려 조정에서는 1376년 나옹선사에게 명을 내려 밀양 영원사塋原寺로 이주하게 하였는데, 이때 몸이 병든 나옹이 예전에 머물던 여주 신륵사에 이르러 입적入寂 하게 되니,그의 문도들은 신륵사에서 다비식을 하고 석종 石鐘 부도를 조성하여 나옹스님의 덕을 기리고자 하였답니다.
이를 계기로 대전大殿, 조당祖堂,승당僧堂, 선당禪堂, 종루鐘樓, 동익당東翼堂, 서익당西翼堂, 남행랑南行廊, 향적당香積堂 등의 많은 건물이 크게 중수重修되어 대사 찰의 면모를 갖추었고 이와같은 사세를 기반으로 신륵사는 고려불교를 개혁하고 중흥하는 중심도량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요.



<명부전>
조선에 들어서 태종의 (1401년)에 의해 소장하고 있던 대장경을 일본에 보내야하는 등 배불정책으로 인해 사세 寺勢가 위축되었다가. 세종 22년(1440년) 태종의 장인이었던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화상畵像 을 봉안하기 위해 중수된 신륵사는 7년 후 영릉英陵의 능침사찰陵寢寺刹이 되면서 다시 한번 큰 중창불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답니다.
세조의 비妃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는 풍수지리상 지세가 불길하다고 하여 예종睿宗 원년(1469)에 서울 강남구 태모산 아래 태종의 헌릉 곁에 있던 세종의 영릉을 여주로 옮기게 하였고, 이에 세조의 유지를 받들어 원찰을 세우기로 하고 당세 권신權臣인 한명회와 한계희가 천년 고찰이라 알려진 신륵사를 택하여 추천하게 되면서 신륵사 내 옛 건물을 중수하기도 하고 새 건물을 건축하여 2백여 칸의 대가람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네요.
또한 극락보전을 중심 전각으로 하여 사찰명을 보은사報恩寺라 바꾸고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으니 이로부터 절은 사세가 더욱 확장되었답니다.

<보물제180호-신륵사조사당>
신륵사의 서북편에 위치한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3화상의 덕을 기리고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 영정을 모셔놓은 곳이라는데 이 세 사람은 서로간에 관계가 돈독 했던 스승과 제자사이였다네요.
신륵사 조사당은 낮은 돌기단 위에 세운 정면 1칸, 측면 2칸의 특이한 구조를 지닌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전면을 제외한 3면은 벽으로 마감하였답니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과 측면의 비례를 1.07:1로 구성하여 거의 정방형에 가깝고 건물내부에 기둥없이 천정을 모두 우물천정으로 짜서 조선초기 다포집 계통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고요.
1963년보물 제 180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양식면에서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그 이후 많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목은 이색이 지은 <보제존자진당시병서>에 의하면 고려 우왕5년(1397)에 진영당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도 조사당이 신륵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답니다. 현재 조사당 내부에는 중앙에 나옹, 그리고 좌우에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을 봉안해두고 있으며, 중앙 나옹화상의 영정 앞에는 목조로 된 나옹스님의 독존獨尊을 안치했다고요.



<칠성각>
임진, 병자란을 거치면서 폐허가 된 신륵사는 현종顯宗 12년(1671년), 이조판서이던 김수항金壽恒과 이조참판 민정중閔鼎重, 호조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중심이 되어 절을 중창하고, 그 후부터는 다시 옛 이름을 찾아 신륵사로 하였다고요.



<심검당?>
숙종肅宗 28년(1702)에는 오대산의 위학偉學, 천심天心, 우안宇眼 스님등이 시주하여 절을 중수하였으며 영조英祖 원년(1725)에는 법밀法密, 영순英淳 스님등이 전탑을 중수하였는데 그 후로도 신륵사는 정조正祖20년(1796)에 공명승첩空名勝捷을 받아 범중루泛中樓 12칸과 좌우 식간食間을 신축하였으며, 철종哲宗9년(1858)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발원에 의하여 당시 호조판서 김병기金炳冀가 장불전藏佛殿, 선료禪療, 종루鐘樓, 향주香廚를 중수한 후 그 내용을 신륵사 중수기에 기록하였다답니다.


<신륵사대장각기비 비각>
대장각기비는 고려말 목은穆隱 이색李穡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인데 이 비각안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보물제230호-신륵사대장각기비>
이 신륵사대장각기비의 비신碑身은 대리석으로 된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둘레에 돌기둥을 세웠으며 비의 형태는 조형면에서 보제존자석종비 보다 훨씬 간략해져 있다. 이숭인李崇仁이 지은 비문은 당시 직제학 권주權鑄가 쓴 자경 2㎝의 해서체인데 탑신에 손상된 부분이 많아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답니다. 그리고 아쉽게도 비를 세운 연대 역시 탈락이 되어 그 시기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으나 대체로 보제존자석종비 제작4년 후인 홍무16년(1383년)으로 추정된다고요.
본래 신륵사에는 경, 률, 론 삼장을 인출하여 이를 수장하던 대장각이 극락보전 서쪽, 지금의 명부전 근처에 있었다고 전하나 아쉽게도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다층전탑 위쪽으로 이 비만 남아 있답니다.

<보물제226호-신륵사다층전탑>
전탑(塼塔)은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는 형식이라고요.
이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으며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랍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는 특이한 형태이며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고요.
수리할 때 세운 비에 의하면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어 조선 영조 2년(1726)으로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네요.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전탑은 또 손을 대고 있는지 비게를 쌓아 놓고 있습니다.

<신륵사보제존자석종>
보제존자석종의 전경인데 석종, 석등 및 저 뒤에 있는 석종비 모두가 보물로 지정되었답니다.

<보물제228호-신륵사보제존자석종>
신륵사 뒷편에 모셔져 있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식인데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으며,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이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습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워 두었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라고요.



<보물제229호-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인데,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형식입니다. 받침 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고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로 씌여져 있답니다.

<보물제231호-신륵사보제존자석종앞석등>
보제존자석종 바로 앞에 있는 석등은 석종부도를 장엄하기 위한 공양구供養具인데 사찰에서 석등을 밝히는 이유는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無明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네요.
화강암이 주재료로 사용되었고, 화사석은 대리석재를 사용하여 조각이 용이하도록 하였는데 각 면마다 정교한 조각이 되어 있습니다.
단순화되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석종형 부도에 비해 이 석등은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을 풍기고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전형적인 8각형 석등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변형을 모색하여 화려하고 장식적인 면이 강조된 고려말기의 대표적 작품으로 보인다고요.



<구룡루>
구룡루는 이 절터의 내력에 대한 전설에서 나오는 아홉마리의 용과 관련하여 이름을 붙인 모양입니다.

<강월헌>
경내의 한쪽, 강가에는 강월헌이라는 정자가 앉아 있어 남한강의 경관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주대교 야경>
신륵사를 나와 콘도로 돌아옵니다.
남자들이 상추를 씻고, 불판을 피는 등 저녁을 차려 놓고 안식구들을 모셨고요.
둘러 앉아 나누는 정담과 돌리는 술잔에 주흥이 도도히 오르네요.
잠시 바람을 씌러 발코니로 나왔다가 여주대교의 야경도 하나 담았고요.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