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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돌이

명성황후생가 (051203)

2005년 12월 03일, 여주에 있는 콘도 두 개를 잡아놓고 가까운 직장 동료 네 쌍이 세상돌이를 떠납니다.

먼저 명성황후 생가로 향합니다.



<호수 및 정자>
명성황후의 생가야 집 한채 뿐인데 그 앞에는 테마파크를 조성하였놓았습니다.
연못을 꾸미고 정자를 세웠고 황후와 연관이 있는 테마의 조각상들이 여기 저기 놓여 있습니다.


<명성황후 동상>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 3년(1866) 왕비로 책봉 되었다고 하는데, 간택된 이유가 8세 때 부모를 여의어 외척의 폐해가 없을 거라는 대원군의 속내가 작용을 하였다고 하네요.
하지만 고종의 사랑을 별로 못 받고 자신이 낳은 왕자가 5일 만에 세상을 떠나는 등 상황을 좋지 않았다고 하는데 천성이 총명하여 얼마 후 부터는 왕실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여 시아버지인 대원군과의 정치적 대립을 겪게 되었답니다.



<명성황후 생가전경>
대원군과의 대립되는 관계를 갖게된 원인은 대원군이 고종의 총애를 받던 궁인 이씨의 소생인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한 데서 시작이 되었답니다.
이에 황후는 대원군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대비 세력, 안동김씨 세력, 노론세력, 유림세력과 민씨세력을 규합하여 이를 바탕으로 고종10년 (1873) 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장악하였답니다.



<문간채>
정권을 장악한 황후는 1876년 강화도조약 을 맺는 등 개화정책을 시행하였으나 불만을 품어온 위저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 문제로 폭등을 일으키고 고종19년(1882)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황후는 궁중을 탈출하여 충주목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을 하여 고종과 연락을 하고 청국에 군사개입을 요청,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하게 하여 정권을 찾은 후 친청사대로 변신을 하였다네요.
이에 불만을 품은 개화파가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잠시 정권을 빼앗겼으나 청국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찾았다고요.
수락산에 가면 용굴암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는데 거기에 이에 대한 내용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이 용굴암에서 잠간 숨어 있으면서 치성을 드리고 가셨는데 다시 집정을 하자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하사금을 내려 그 것으로 법당을 지었다.">



<중문채>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조선 정계에 압력을 가하자 황후는 친러 정책으로 일본세력에 대항을 하였는데 고종32년(1895) 10월 2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라는 녀석이 명성황후와 그 친족을 제거할 목적으로 김홍집 내각의 일부 세력, 대원군 세력 그리고 해산 예정인 훈련대와 일본 정치낭인들을 시켜 황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답니다.



<내당>
황후의 생가는 행락채의 가운데에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다시 중문채가 나오고, 그 안에 내당이 있으며, 동쪽 협문을 들어서면 초당이 있는 가옥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가옥의 내부는 우리의 전통가옥과 같이 10자 한 간으로,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아주 작게 보였는데 대청에는 명성황후의 영정이 걸려있었습니다.

<명성황후 영정-내당>
명성황후 생가 안내문을 잠시 읽어 봅니다.
조선 제 26대 고종황제의 비로 뛰어난 외교력으로 나라의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다가 1895년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히 시해된 명성황후의 생가로 1851년 이곳에서 태어나 8세까지 살았던 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초당>
원래 이 가옥은 조선 숙종의 왕후,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며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막으로 건립되었답니다.인현왕후는 요부인 장희빈에 의해 피해를 보았던 비련의 왕후로 많이 알려져 있지요.
당시의 건물로 남아있던 것은 안채뿐인데 1995년 부터 명성황후의 뜻을 기리고자 명성황후 생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사랑채, 행랑채, 별당을 복원하였고 또한 기념관, 공연장, 추모비, 동상, 조각공원들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명성황후 탄강비각>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고향집에 세운 비석이 있는 비각입니다.
탄강(誕降)은 왕이나 성인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말하는 거시고, 구리(舊里)는 고향이라는 의미로 "명성황후께서 태어나신 마을"이라는 뜻이라고요.



<명성황후 탄강비>
원래 이자리에는 명성황후가 어린 시절에 공부하던 별당채가 있었으나 동학농민혁명 때 소실되었다고 하며 1904년에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비석의 뒷면에는 "광무8년 5월 일 배수음체경서"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손을 맞잡고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썼다"라는 뜻으로 아들이신 순종황제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민유중 신도비-향토유적 5호>
명성황후 탄강비 옆에는 민유중 신도비가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민유중(1630~1687)은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로 본관은 여흥이며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랍니다.
송시열의 문인으로 1650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숙종 7년 딸이 숙조의 계비가 되자 영돈녕부사가 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이라고 하네요.



<민유증 신도비의 거북>
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이 특이하게도 목을 길게 빼어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신도비는 묘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신도비의 주변에는 묘가 보이지 않네요.
앞에 있는 안내비를 보니 묘는 이곳에서 150m떨어진 산중에 위치하고 거기에는 민유중과 그의 두 부인이 합장되어 있다고요.
거북이가 고개를 길게 삐어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는 것은 묘가 있는 지점을 가리키기 위함이라고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명성황후 생가 안내도>
전시관에는 당시의 여러 유물들과 사건들이 구비되어 있고 시행당시를 홀로그램으로 꾸며놓아 생동감을 느끼게 합니다.
유물의 촬영을 허용이 되지 않았고요.
주차장으로 돌아와 세종대왕의 영릉으로 옮깁니다.

kangjine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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