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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돌이

배론성지(051110)

2005년 1월 10일, 태릉성당의 구역장, 반장 등 50여분의 자매님의 틈에 끼어 배론성지로 향합니다.
배론마을은 치악산 동남 기슬게 우뚝 솟아 있는 구학산과 백은산의 연봉이 둘러 싼 험준한 계곡 양쪽의 산골마을로
2005년 1월 10일, 태릉성당의 구역장, 반장 등 50여분의 자매님의 틈에 끼어 배론성지로 향합니다.
배론마을은 치악산 동남 기슬게 우뚝 솟아 있는 구학산과 백은산의 연봉이 둘러 싼 험준한 계곡 양쪽의 산골마을로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배론이라고 부리었답니다.
외부와의 교통이 어려워 초대교회의 교유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화전과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키워 나간 교우촌으로 1866년 병인 박해 전까지 아랫배론, 웃배론, 점촌배론, 박달나무골, 바둑재 마을의 6개마을에 70여호가 있었다고요.
2001년 3월 1일 이 배론성지는 충청북도 도 문화재(지방기념물 제 118호)로 지정되었답니다.

<예수부활상>
성지에 주차장에 도착하여 버스에 내리니 성지쪽에 예수님부활상이 세상의 모든것을 포용하려는 듯 두팔을 벌리고 있습니다.


<성지 안내판>
성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성지 안내도입니다.



<성모동산>
십자가의길로 올라가는 입구에 성모동산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주변 여기저기에는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고요.



<최양업신부 상>
최양업신부님은 1836년 12월에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고 1849년 사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김대건신부님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았답니다.
동상 아래에는 최신부님이 지었다는 "사향가"라는 창가 가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지자들의 표>
동상 위쪽으로 "십자가의 길"의 1처가 시작되어 여기부터 기도를 드리며 진행을 합니다.
3처까지 오니 그 옆에는 성직자의 묘소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십자가의길>
순례단의 자매님들이 '십자가의 길' 4처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중략~
어머님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최양업신부의 묘>
'십자가의 길' 14처가 끝나는 위 쪽에 최양업신부님의 묘가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비석에는 "사제독마최정구지묘"라고 되어 있는데 안내문을 보니 독마는 신부님의 세례명인 도마의 표기이고 최정구는 최양업신부님의 관명이라고 하네요.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님은 귀국을 하여 12년동안 하느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영혼을 구하려는 불깥은 열정, 그리고 훌륭한 판단력 등으로 한국 교회를 위해 일하다가 과로로 1861년 6월 문경에서 숨을 거두었고 그해 11월에 성요셉 신학교 뒤산의 언덕에 묻혀는데 그 후 박해로 주인없는 무덤처럼 버려졌던 것을 1942년 정비를 하고 묘비도 마련하였으나 일제의 압박으로 세우지 못하였다가 1945년 9월 27일 제천본당 봉신부와 원주 박일규신부 등이 교우들과 함께 묘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미사를 집전하신 보좌신부님은 강론을 하시면서 온몸으로 주님을 모신 분이라고 소개를 하네요.



<성지원경>
성요셉성당, 예수부활상, 연못 등이 주변의 단풍과 어우러져 있습니다.



<황사영 백서를 쓴 토굴>
이 토굴은 1801년 진사 황사영(알렉시요)이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백서)를 쓴 곳으로 그후 매몰되었으나 교회사연구팀의 발굴 작업과 고증으로 1988년 복원을 한 곳이랍니다.


<성요셉신품학당>
이 신품학당은 1855년 메스뜨르 이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이 건물은 성인 장주기(요셉)의 집으로 본래의 건물은 한국전쟁때 소실되었고 당시의 사진과 고증에 의해 1987년에 복원을 하였답니다.
1856년 쁘르띠에 신신부와 쁘띠니꼴라 박신부가 교장과 교수로 부임하여 라틴어와 철학, 신학을 가르치며 사제양성을 하였으나 1866년 병인년 박해로 두 신부와 장주기(요셉)이 체포되어 순교하자 학당은 폐쇄되었다네요.



<교장과 교수, 그리고 신학당터 십자비>
신품학당 앞에는 신학당터 십자비가 세워져 있고 교장인 쁘르띠에 신신부와 교수인 쁘띠니꼴라 박신부의 상이 양쪽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옹기가마>
옹기는 박해시대의 교우들의 연락과 생계를 위하여 옹기를 구워 장사를 하였다고요.

<성요셉 성당>
1980년에 완공된 성요셉 성당입니다.
장주기(요셉) 성인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성당인가 봅니다.



<황사영 순교헌양탑>
황사영 알렉시오는 16세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정조대왕께서 그를 불러 치하한 후, 손을 잡고 "네가 20세가 되거든 내게로 오라.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일을 시키고 싶다."고 하였답니다. 그 후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과 결혼하고 그 해 천주교에 입교를 하였는데 처가 쪽이 이벽(세례자 요한), 홍재영(프로타시오), 이승훈 등과 친인척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요.
그 후 과거시험에 백지를 내자 정조대왕은 대신을 시켜 충분히 공부하여 응시하도록 권유를 하였고 또한 천주교에 입교한 것을 알고 몸시 슬퍼하며 연민의 정을 나타내었다고 합니다.
백서를 운반하던 황심이 9월 15일 먼저 잡히고, 9월 29일 황사영이 체포되어 10월 3일 의금부로 이송되었고 11월 5일 대역부도의 죄로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를 당했다고 합니다.



<무명순교자들의 묘>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순교한 분들의 묘랍니다.



<최양업신부의 조각공원>



<배론성당 전경>



<소성당 내부>
소성당에서 미사를 드립니다.



<황사영 백서 모사품>
황사영은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이곳 배론마을로 피신하여 토굴을 파고 약 8개월간 은거하면서 교회의 재건을 이해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썼는데, 이 백서는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천에 13384자를 썼으며 순고자의 사적과 박해의 원인, 그리고 교희 재건을 위한 도움을 청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고요.
그러나 백서를 가지고 가던 황심이 체포되어 황사영은 27세의나이로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이 후 이 백서는 의금부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1894년 신자인 이건영(요세)에게 넘겨졌고 이것을 민주교에게 넘기었는데 1925년 한국순교자 79위의 시복식 때 교황 비오11세에게 봉정하여 지금은 바티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백서는 교황께 봉정하기 전에 동판으로 모형을 만들어 보관을 하고 있다고요.



<배론대성당 내부>
성당의 내부의 형태는 배론마을의 모양과 같이 조성을 했다고 합니다.



<성모자상>
성당 앞의 잔디광장에는 성모자상이 서있습니다.



<예수님고상>


<관리사무소>
관리사무소의 뒤산은 단풍이 한창입니다.



<도담삼봉>
성지를 나와 돌아오는 길에 도담삼봉을 둘러봅니다.
가운데는 남편봉이고 북쪽은 처봉이며 남쪽은 첩봉이라고 하네요.



<언덕의 정자>
도담삼봉의 앞쪽 언덕에는 조그만 정자가 앉아 있습니다.
도담삼봉의 정자에서 시를 읊고 술을 마시는 것도 좋겠지만 저 언덕위의 정자에서 삼봉을 내려다 보며 마시는 술이 더 흥취가 날 것 같습니다.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