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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돌이

월출산 도갑사 (050723)

2005년 7월 23일, 월출산의 억새밭을 지나 도갑사로 내려옵니다.
도갑산에 못 미쳐 있다는 도선수미비를 혹시나 지나칠까 우려되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내려오니 잘 지어놓은 건물을 만나 안내문을 보니 도선수미비를 보호하기위해 비각을 설치한 모양입니다.


<도선수미비-보물 제1395호>
이 비는 도갑사를 일으킨 도선과 중창한 수미선사 두 분의 공적을 새긴 높이 4.8m, 폭 1.42m의 거대한 비석으로 이 비는 삼전도비를 쓴 영의정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한석봉의 제자인 오준의 것으로 17년을 걸려 제작, 효종 4년(1653)에 완성을 하였답니다.
엄청난 크기의 거북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약간 돌린 형상이고 꼬리는 왼쪽으로 젖힌 자세로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두툼한 등에는 연꽃잎, 비석의 용머리(이수: 용의 모습을 새긴 비석머리)에는 두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을 아주 정교하게 새겨 있어 보는 사람이 주눅을 들게 합니다.
그런데 이 비각의 앞에 서있는 안내문을 보면 '도갑사 도선수미비'라고 되어 있으면서도 그 내용에는 이 절의 창건자인 도선선사에 대해서는 한마디 설명이 없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부조군>
도선수미비의 옆에는 도갑사 출신 고승들의 것으로 보이는 부조군이 보입니다.

<도갑산 배치도>
도갑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6년(880)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1999년 대웅전 뒤편 건물지에서 백제시대 기와편이 출토되어 그 이전에 이미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답니다.
이 절은 조선 세조때로 이곳 출신인 수미왕사가 1457년 부터 1464년까지 크게 중창했는데 당시 건물규모가 966칸이고 소속암자가 12곳, 이 곳에서 수행하는 승려가 780명에 이르렀으나 정유재란때 소실되어 그 후 부흥하여 오다가 영조52년(`776)과 헌종원년(1835)에도 부분 중창을 하였다고요.
그러다가 한국전쟁과 화재 등으로 많은 가람이 소실되었고 1995~1999년까지 실시한 네번의 발굴조사에서 옛 가람터를 확인하고 복원불사를 추진하고 있답니다.
그럼에도 현재 경내에는 국보50호인 해탈문 등 국가지정문화재 4점과 석조 등 전남 지정문화제 5점의 문화재가 있다네요.

<홍예교>

등산로에서 이 다리를 건너 도갑사로 들어가는데...
이쪽을 봐도 그렇고 저쪽을 봐도 그렇고 다리 이름이 안보여 그냥 홍예문이라고 불러줍니다.

<미륵전>

등산로에서 내려오다가 홍예교를 건너기 전에 언덕에 있는 미륵전입니다.
유홍준 교수는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이 미륵전에는 미륵불상이 모셔져 있지 않고 아래의 석가여래좌상을 모셨는데 이는 부처님의 교리보다도 그저 세상을 구원한다는 미륵님이면 그만이던 조선후기 말세의 신앙이 남기 흔적>이라고 기술했던것을 본 기억이 나네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89호>
그래서 미륵전 안에 모셔진 불상이 미륵불이 아니고 석가여래좌상이구나 하면서 사진을 담습니다.
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 89호로 대좌와 불상 그리고 광배가 일체로 되어 있는 근엄한 표정을 짖고 있습니다.


<옛가람의 유지 및 복원>
홍예문을 건너 도갑사 경내로 들어오니 건물을 복원하고 있으며 그 주위에는 옛절집의 유지인지 주초가 여기저기 놓여져 있는데 규모가 대단합니다.



<3층석탑>
그 옆에는 조그만 삼층석탐이 돌무더기와 섞여 서있는데 손상이 많이 되어 있습니다.



<대웅전 터>
대웅전을 복원하고 있는지 아니면 다시 짖고 있는건지?



<명부전>
명부전을 임시 대웅전으로 사용하고 있고 그에 따라 명부전은 그 건너 건물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국사전>
국사전의 국사는 도선국사를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조때 이절을 크게 중창한 수미대사를 뜻하는 것인지 설명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도선국사라고 칭하니 아마도 도선국사를 지칭하는 것이 겠지요?



<수미왕사비>
유홍준 교수의 문화유적답사기에 보면 <도갑사 경내에 묘각화상의 탑비가 덩그라니 있는데...중략...비문 중에는 특이하게도 석수와 야장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구절이 있어 이 비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했는데 유교수의 글에는 건립연대가 1629년인데 여기의 안내문에는 숙종 15년(1689)~19년(1693)의 기간에 세웠다고 되어 있어 그 묘각화상의 탑비와는 틀린것인지 아니면 년대의 기록이 잘못된것인지?
묘각은 세조가 수미선사에게 내린 호라고 합니다.



<당간지주>
큰 절의 문 앞에 그 절의 이름난 중을 세상에 알리거나 또는 기도나 법회 등이 있을 때 당(幢)을 달아 두는 기둥을 받쳐주는것을 당간지주라고 한다는데...대웅전터 밑에 당간지주 두쌍이 방치되어 있습니다.



<오층석탑-전남 유형문화재>
통일신라 이후에는 대체로 삼층석탑 형식을 취했다고 하는데 이 도갑사에는 석탑이 오층이고 안내문에는 고려시대 초기에 조성된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석조-전남유형문화재>
이 석조의 크기는 길이 467Cm, 폭 116Cm 그리고 높이 85Cm의 대단한 규모입니다.
이 석조에는 "강희21년 임술"이라고 새겨져 있어 만든 시기가 조선 숙종 8년(1682)으로 보여지고 있답니다.



<범종각>



<세진당>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세진당인데 절집 보다는 일반 전통 한옥의 분위기를 띈 깔끔한 자태로 앉아있습니다.
들어가 보려는데 입구에 출입금지 표시가 있어 사진만 담았고요.



<회랑유지>
옛 기록 (남유록)에 의하면 종각 남쪽에 긴 회랑이 있는데 30칸이라고 되어 있답니다.
발굴 조사결과 그 기록의 내용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장랑(회랑)지 등의 유구를 확인했는데 우측으로 12칸, 좌측으로 10칸의 장대한 건물지라고 합니다.



<사천왕문지>
본 사천왕문터는 발굴시 좌우측칸의 가장자리에서 사천왕상 토제 소조상이 남쪽 내부에 2구, 북쪽에 1구가 발견되었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석 배열상태가 문지 형태였답니다.
일휘문, 당초문 문양의 암막새, 연화문 숫막새, 용두편, 불상편 등이 다량으로 발굴되었다고요.



<도갑사 중창 계획 조감도>
경내에 세워진 도갑사 중창계획 조감도를 보면 참 대단한 규모의 사찰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해탈문-국보 제 50호>
해탈문은 국보 제 50호로 이문은 속세를 벗어나 법계로 들어가는 문이랍니다.
이 해탈문은 1960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조선 성종 4년(1473)에세 다시 세운것이랍니다.
석조기단 위에 중앙칸은 통로가 되고 좌우 한 칸씩에 사천왕상은 안치하였고 기둥은 약한 배흘림의 둥근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영주 부석사 조사당과 비슷한 양식으로 지어졌답니다.
특이한 점은 기둥위의 구조가 주심포식(하나의 기둥에 하나의 공포)과 다포식(기둥과 기둥사이에도 공포설치)양식이 섞인 형태로 우리나라에서 유례가 드문 귀중한 자료라고 안내문에 되어 있습니다.
국보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뒷면, 앞면, 측면등을 둘러 보며 사진을 담고나서 매표소를 거쳐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