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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돌이

화성행궁 (050603) 정조대왕의 속내가 있던 곳

2005년 6월 3일, 수원화성의 성곽 답사를 마치고 화성행궁으로 향합니다.
화성행궁은 정조13년(1789)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한 행궁으로 수원부 관아와 행궁으로 사용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정조18~20년(1794~1796)에 걸친 황성축성 기간에 행궁을 확대하여 최종 완성이 되었답니다.


<화성행궁 전경>
정조대왕은 효심이 지극하여 부친인 사도세자의 원침인 현륭원(지금의 응릉)을 13차례 참배하였으며 이 기간에는 화성행궁에서 유숙을 하셨다고 합니다.
건립 당시에는 봉수당, 복내당, 유여택, 신풍루, 남북군영, 후화관, 득중정 등 600여 칸의 정궁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며, 정조대왕은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을 이곳에서 열기도 했답니다.

<화성행궁 배치도 및 관람동선>
우리나라 행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으나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인하여 낙남헌을 제외한 모든 시설물이 사라져 버린 것을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에 복원공사에 착공하여 1단계 복원공사를 완료하고 2003년 10월 부터 시민들에게 공개를 하였답니다.
지금도 팔달산에 인접해 있는 후원의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신풍루와 홍살문>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의 앞에는 홍살문이 당당하게 서있으며 그 오른쪽에는 하마비가 자리를 잡아 행궁으로서의 위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수원행궁은 서울의 창경궁처럼 동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무슨 이유라도 있는지?
신풍루는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의 뜻으로 정조에게는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곳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무슨 현수막이 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신풍루에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어 옆에 있는 매표소와 관광안내소에 문화재, 그것도 행궁의 정문에 왠 현수막을 걸어 놓느냐고 항의를 하자 행궁의 특별행사인 무예24기의 공연에 대한 현수막이라며, 귀찮게 왠 참견이냐는 듯한 표정입니다.
마당의 양 옆에도 건물의 벽으로 되어 있어 거기에 걸어도 되련마는, 다른 사람들이 이런 행위를 하더라도 말려야 할 행궁 관리요원들이 이러니......

<집사청>
신풍루를 들어서 우측으로 600년이 넘는 수령을 가진 느티나무가 자리를 하고 있고 그 옆의 문을 들어서면 집사청이 나옵니다.
집사는 주인을 모시고 그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들로서 행궁의 집사청은 궁궐의 액정서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랍니다.

<북군영>
집사청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북군영이 나오고 그 앞에는 당시 장용영에서 사용되었던 각종 화포, 칼, 창, 화살 등의 무기가 진열되어 있어 당시의 무기체계를 살펴볼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장용영을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壯勇營 조선 후기 왕권강화를 위해 설치한 금위조직(禁衛組織). 1785년(정조 9) 새로운 금위체제를 위하여 창설한 장용위라는 국왕 호위 전담부대를 93년 규모를 확대하여 장용영이라 하였다. 도성을 중심으로 한 내영과 수원(水原)·화성(華城)을 중심으로 한 외영으로 이루어졌다.
외영제는 수원부(水原府)를 화성으로 개칭하고 부사에서 유수로 승격, 장용의사와 행궁정리부(行宮整理府)의 직을 겸하게 하였으며, 그 아래에 판관을 두었다. 이는 정조가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현륭원(顯隆園)을 중시하여 취한 조치였다. 외영의 편제는 입방군(入防軍)·협수군(協守軍)으로 구성되었고, 이와는 별도로 수성군(守城軍)이 구성되어 있었다. 외영의 편제는 98년 크게 개혁되어 오위법으로 변하였다. 설치목적이 왕권강화에 있었으므로 중앙집권적 오위체제를 도입하여 강력한 왕권의 상징으로 삼으려 했으나, 정조가 죽은 뒤 1802년(순조 2)에 폐지되었다.>


<좌익문>
다시 느티나무 있는 곳으로 돌아나와 정면의 좌익문으로 들어갑닌다.
좌익문은 신풍루와 중양문 사이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이랍니다.


<중양문>
좌익문을 지나니 중양문이 나오는데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이랍니다.


<봉수당>
중양문을 들어서니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이 자리를 하고 있으며 중양문에서 봉수당까지는 박석을 깔은 삼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2중의 기단으로 된 월대위에 앉혀진 봉수당은 팔작지붕의 정면 6칸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진찬례를 이곳엣 베풀고 새로이 '만년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고 하였답니다.

<봉수당내부의 보좌>
봉수당의 중앙에는 일월오악도 병풍을 뒤에 받친 보좌가 놓여 있고 그 오른쪽은 정조대왕이 묶을 때 쓰던 집무실이 있습니다.
좀 특이한 것은 건물이 정면 6칸이고 가운데 두칸을 합하여 어좌를 놓다보니 어좌에서 밖을 보면 기둥이 가운데에 서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경룡관>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태평성대를 구현댔던 당태종이 거처한 궁궐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장락당>
경룡관을 들어서면 봉수당과 서남쪽 지붕과 겹치게 연결되어 지어진 장락당이 나옵니다.
장락당은 침전으로 중국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왔다고요.


<노래당>
장락당의 좌측 뒤편에 있는 조그만 문을 지나 장락당과 봉수당의 뒤쪽으로 돌아가면 어천문(於千門)이 나오고 그 문을 지나면 노래당이 나옵니다.
노래당(老來堂:늙어서 돌아온다)의 당호와 행궁의 규모에서 당시 당파들의 당쟁을 잠재운 후에 상왕으로 물러나 이곳에 내려와 거주하려했던 정조대왕의 의중이 엿보이는데 불행히도 화성을 완공하고 8년만에 의문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까 들어온 어천문이 노래당에서 보니 삼수문(彡壽門)으로 되어있는데 앞뒤가 틀린 문호도 그렇고 길게자란 머리털을 뜻하는 삼(彡)을 쓴것도 무슨 뜻이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낙남헌>
노래당 앞에 있는 쪽문을 나와 담을 끼고 좌측으로 돌아가면 낙남헌이 나옵니다.
낙남헌은 행사용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일제의 강점기에 다른 건물은 다 헐렸는데 훼손당하지 않은 건물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랍니다.


<득중정>
낙남헌을 왼쪽으로 끼고 돌면 득중정이 나옵니다.
득중정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정조가 직접 편액을 써서 걸었다고 하며 정조14년(1790)에 정조대왕이 이곳에서 활을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이라 하였답니다.


<복내당>
행궁의 후원은 한참 복원공사를 하고 있어 후원 뒤편에 있는 정자인 미로한정에는 접근이 되지 않습니다. 미로한정은 육면정이라고 하는데 '장차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으로 정조의 속내가 배어 있는듯 하고요.
뒷편 행각을 따라 오다 복내당으로 들어 옵니다.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으로 정조대왕이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의 편액을 직접써서 달았답니다.
복내당에 들어서니 대장금을 촬영한 곳이라는 표식과 이영애의 대형 사진을 게시해 놓았고 마루에 있는 TV에서는 대장금의 어떤 장면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대만인지 중국에서 온 단체관광객들이 비치되어 있는 한면이 6~7Cm정도인 복내당 Stamp를 종이에 찍어 기념으로 보관을 하는 모습도 보이고요.

<유여택>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 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대왕이 행차시에는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장소로 씌였다고 합니다.

<앙부일구>
유여택의 앞 뜰에는 해시계인 앙부일구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비장청>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 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들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며 민정시찰을 했는데 이들이 사용하던 건물인가 봅니다.


<서리청>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으로 서리청은 그들이 사용하던 거물이며 1795년 을묘원행시에는 수라칸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답니다.


<남군영>
남군영과 북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병인 친군위가 근무하는 곳으로 화성행궁의 수비를 맡았답니다.
남군영에는 갑주가 전시되어 있고 그 왼편 행각에는 도검류, 화살, 군모와 군복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기중기>
신풍루를 들어서면 왼편에 기중기가 놓여 있는데 이것은 정약용이 정조가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이라는 책을 참고로 해서 개발하여 화성의 축성에 사용하였던 것이랍니다.

<어연>
기중기가 있는 그 맞은편에는 어연과 가교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어연은 임금의 거동에 타는 가마로 난가 또는 난여라고도 부르는데 가마추녀 위 네 곳에 닭을 닮은 난새라는 검은 새가 긴술을 물고 있고 주렴도 많은 색술이 치렁치렁 달린 보장이며 가마의 바탕줄레에는 용, 기린, 해태, 법, 코끼리들이 금빛으로 장식되어 위엄을 갖추고 있답니다.

<가교>
가교는 가마의 양끝을 말의 안장에 연결하여 두 마리의 말이 앞뒤에서 끌도록 한 것으로 을묘원행때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한양에서 화성까지 모시기 위해 특별히 만든 것으로 29개 분야의 장인 120명이 제작에 참여했다고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기록되어 있답니다.

<기층헌>
외정리소는 1795년 을묘원행의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기관이었는데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 하여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에서 행사를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답니다.
외정리소는 평소에는 궁중유물을 보관했다가 행차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곳으로 기층헌에는 다양한 궁중악기를 재현해 놓았습니다.


<편경과 편종>


<진고와 운라>

   

<특종과 특경>



<정조대왕 동상>
행궁의 뒤편 언덕에는 정조대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