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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돌이

041127 경복궁(1/6) - 외조 공간

2004년 11월 27일
경복궁을 둘러보러 갑니다.
지하철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는 쪽의 출구로 나오는 통로에는 여기에 있던 박물관의 유물들을 용산에 신축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긴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습니다.
 

<경복궁 배치도>
1990년 이후 경복궁의 복원작업에 의해 복원된 현재 경복궁의 배치도 입니다.
많이 복원이 되었지만 아래의 북궐도에 있는 본래의 경복궁으로 복원하려면...

 

<본래의 경복궁 배치도>
태조가 1394년9월에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여 부터 건설계획을 수립하여 서울건설계획을 세우고 경복궁은 북악의 남쪽기슭에 터를 잡았고 좌묘우사(左墓右社)의 법식에 따라 종묘와 사직단을 동서에 배치, 착공 1년 반만에 380여 칸을 완공을 하였고 시경에 나오는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 그대의 큰복 경복을 누리소서'의 구절을 인용하여 정도전이 '경복궁'을 제청, 태조가 받아들였답니다.
태조가 서울로 천도한 후 왕자의 난을 겪고 나서 정종이 태조를 모시고 개성으로 환도하였다가 태종 6년에 다시 서울로 환도하여 조선의 정궁으로 되살아 났구요.
1592년 임진왜란 때 패허가 되었고 그 후 창덕궁, 창경궁이 중건되고 경희궁을 새로 지었으나 경복궁은 규모가 방대하고 풍수리지리상으로 불리하다는 의견에 따라 방치되다가 273년 후인 1865년에 대원군에 의해 황가의 권위를 찾기위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4년만에 7225칸의 건물이 중건이 되었답니다.

 

<광화문 - 수문장 교대식이 거행되고 있음.>
국립중앙박물관쪽의 광장으로 나오니 광화문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몰려 무언가를 보고 있는데 가까이 가보니 수문장 교대식을 하고 있어 이를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광화문 밖 남쪽에서 광화문을 담으려니 공간이 없어서 안쪽에서 담았네요.
경복궁에는 광화문과 동문인 건춘문, 서문인 영추문, 북문인 신무문의 4개의 문이 있는데 남문인 이 광화문이 정문으로 본래 이름은 오문(午門)으로 '이 문을 닫아서는 괴이한 말을 하는 부정한 백성을 거절하고, 이 문을 열어서는 사방의 어진이를 오게 하리니 이것이 다 바르고 큰 것'이라는 의미로 정도전이 지었으나 세종때 지금의 광화문으로 바뀌었답니다.
광화문은 돌로 쌓아올린 무지개 형태의 홍예문과 크고 화려한 겹처마의 2층 다락집으로 경복궁의 건물중 가장 뛰어난 집이었는데 1926년 일제 총독부의 등장과 함께 헐리어 동쪽의 건춘문옆으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때 소실되고 돌축대만 남았었다구요.
박정희 정권때 본래의 자리로 옮겨 세워졌는데... 위치도 틀리고 본래의 목조가 아닌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졌고 문짝도 나무가 아닌 철판으로 만들어 군사문화적 발상에 의해 또 한번 수난을 받았답니다.
홍예문 천정에는 가운데문에는 남쪽을 수호하는 주작도가, 동쪽문에는 천마도, 서쪽문에는 현무도가 그려져 있구요.
 

<해태상>
광화문을 지키고 있는 해태는 성군을 영물스러운 짐승으로 성군을 도와 현명한 일을 많이 하며 잘못한 사람은 뿔로 받는 정의의 수호신이자 화재를 재압하는 물의 신을 상징하여 풍수지리상 관악산의 화기가 도성을 넘보고 있어 이를 제압하기 위해 세웠다나요.
지금은 광화문에 붙어 있지만 원래의 자리는 80여 메터가 떨어진 종합청사 자리였다구요.

 

<흥례문(홍례문)>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시해되고 러시아공관으로 파천을 한 후 비어있다가 1910년 을사늑약으로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는 총독부를 짖는다는 구실로 근정전 남쪽의 모든 전각을 철거, 재목을 일반인들에 매각하고 일부는 일본으로 가져가 개인집을 짖기까지 했다네요.
이 흥례문도 그 때 헐리고 총독부의 건물이 들어섰는데 1990년부터 경복궁 복원작업이 시작되었고 1993년 총독부 건물의 철거를 결정, 1996년 완전히 철거되었고 2001년 이 흥례문을 복원하였네요.
지금도 친일의 흔적이 있는 기득권자들이 세인의 지탄에도 가끔씩 고개를 내밀고 하지만 총독부건물의 철거때도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었지요.
철거공사가 막바지에 이르었던 1996년 11월 14일 이 철거 현장을 내부 점검차 방문했었는데 현장에서 특별히 신경을 썼던것이 총독부건물의 잔해 관리였던것으로 기억됩니다. 철거현장의 주변은 쥐새끼도 들어오지 못 할 정도로 울타리를 쳐놓았는데...
일본인( 민간 관광객을 포함)들은 물론 한국사람(아마도 친일관계자 내지는 그 후손들..)들이 일본의 한국지배의 상징물인 총독부건물 잔해를 소장하려고 안달하고 있어 이를 막기위해 그렇게 했는데 소문에는 일부 힘있는 내노라 하는 사람들까지 몇 조각좀 달라고 압력을 넣었다는 소문이 있었구요.
어찌된 일인지 그렇게 엄격하게 잔해의 유츨을 막었던 당국이 철거완료시점에서 원하는 사람들에게 분배해 주었다고요?
일제의 치욕을 잊지않고 후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위해서 총독부건물의 첨탑은 박물관에 보관을 하기로 했다고 했는데 왜 이들은 그 깨진 콘크리트 조각에 그렇게 연연하는지...
독립운동, 민족운동을 한 많은 애국지사들과 그 후손들은 지금도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데 이들을 탄압하고 짖밟으며 호의호식했던 친일세력들은 지금도 떵떵거리고 살고 있다는데.. 언제쯤에야 정의로운 사회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흥례문의 답도>
국왕만이 다닐 수 있었던 어도로 국왕의 권위로 상징되고 있으며 양 옆에 서수가 업드려 있고 가운데는 봉황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명당수>
흥례문은 들어가면 명당수가 서쪽에서 들어와 동쪽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경복궁의 명당수는 북악산록에서 발원하여 서쪽 담장을 따라 흘러 영추문에서 직각으로 꺽어져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를 시나 동남쪽 담을 통과해 청계천으로 흘러가는 서류동입의 명당수랍니다.
이 명당수는 총독부건물의 부지 확보를 위해 메워진것을 1990년부터 시작된 복원계획에 따라 복원했구요.

 

<영제교>
영제교는 명당수를 건너는 다리로 성스러운 궁궐과 외부공간을 구분짖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답니다.
이 영제교도 총독부건물의 부지 확보를 위해 해체하여 수정전 앞뜰에 쌓아 놓았던 것을 1970년 근정전 동쪽에 복원했다가 총독부건물를 해체하고 나서 제자리인 지금의 자리에 복원되었다구요.
영제교가 앉아 있는 명당수 축대의 네곳에는 네 마리의 돌짐승이 조각이 눈에 띕니다.

 

<영제교의 서수>
영제교의 네 곳에 엎드려 눈을 부라리며 명당수를 바라보고 있는 돌짐승은 천록 또는 산예로 불리는 상상속의 서수로서 본래는 16마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서수는 겨드랑이와 뒷다리부근에 갈기가 선명하고 정수리에 뿔이 달려 있으며 눈을 부릅뜨고 삼엄한 눈길로 명당수를 쏘아보고 있습니다.
이는 혹시 명당수의 물길을 타고 잠입할지 모르는 사악한 것들을 색출하여 궁궐의 법전을 신성하게 지키고 있는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답니다.
 

<유화문>
광화문과 흥례문의 서쪽 행각에 설치된 문입니다.
경복궁은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외조, 치조, 연조 및 원유의 4개 구역으로 구분하는데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는 외조라 하여 홍문관, 승정원 등의 여러 관청이 있었답니다.

-- 경복궁(2/6)으로 계속--
*참고 및 인용: '서울의 의미를 찾아서'안 현장의 안내문.
kangjine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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