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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돌이

041126 덕수궁(1/3)

2004년 11월 26일... 덕수궁을 찾아 봅니다.
덕수궁터에는 세조의 큰아들인 의경세자의 묘가 있던 곳으로 세자빈 한씨가 그옆에서 살았고 슬하에 월산대군과 자을산대군있었고 차남인 자을산대군이 성종으로 입궐하자 한씨도 같이 입궐을 하였고 그 집은 월산대군의 사저가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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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안내도>

그후 임진왜란때 모든 궁궐이 소실되어 선조가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던 이곳을 행궁으로 삼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며 '경운궁'이라 불렀으며1895년 을미사변때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은 황태자와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을 하고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즉조당을 정전으로 이용하였으나 왕실의 존엄성을 과시하고자 왕궁으로 확장수리하여 중화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들을 세워 창덕궁에 견줄만하였다고 합닌다.
1904년 방화로 추측되는 화재로 인하여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지만 고종의 단호한 결의로 다시 경운궁을 복원하였으며 지금의 중화전, 중화문, 광명문, 즉조당, 석어당, 함녕전 및 대한문은 이때 지어졌는데 아쉬운것은 원래 2층구조였던 중화전이 지금과 같이 단층으로 복원이 되었다네요.
그후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를 하고 이곳에 머물자 장수를 비는 뜻으로 현재의 '덕수궁'이라는 이름을 붙여다고 합니다.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으로 중화전 남쪽에 위치하여 정문, 중문, 정문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었으나 고종때 중건을 하면서 환구단을 향하여 배치한것이 오늘날의 위치랍니다.
대한문의 원래 이름은 大安門이었는데 1903년에 지금의 大漢門으로 바꿨답니다.
2004년 11월 26일 덕수궁을 방문했을때는 대한문을 가림막으로 가리고 개보수를 하고 있어 보지를 못했으며 또한 이로 인하여 명당수를 건너는 금천교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광명문>
광명문은 왕의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광무8년(1904)에 화재로 타버린 것을 같은해에 다시 지었으며 1938년에 석조전을 미술관으로 개관하면서 홍천사의 범종과 창덕궁 보루각있던 자격루(물시계)를 지금의 자리로 옮길때 이 문도 같이 옮겨 세웠다구요.

 

<중화문>
정전의 중문으로 지금은 홀로 외롭게 서있지만 원래는 중화문과 행각들이 사방으로 중화전을 위엄있게 감싸고 있었다고 합니다.

 

<중화전>
보물 제819호로 덕수궁의 정전으로 불타기 전에는 2층의 웅장한 구조였으나 1904년 지금의 구조로 중건을 하였으며 국왕의 즉위식 또는 공식적인 대례를 거행하던 곳이랍니다.

 

<중화전의 답도>
중화전에 오르는 답도는 왕만이 다니는 길로 답도의 가운데에는 왕을 상징하는 봉화이 조각되어 있으며 답도의 양쪽에는 서수가 업드려 있습니다.
봉황은 암컷은 봉이고 수컷은 황으로 성군이 나타나면 나타나는 새라고 하여 답도에 새겨 놓은것 같구요.

 

 

 


<어도, 품계석 및 박석>
궁궐의 정문에서 정전에 이르는 길은 삼도로 되어 있어 가운대의 높은 부분은 왕만이 다니는 어도이며 양옆의 낮은 곳은 호위하는 신하들이 다니던 길이랍니다.
또한 정전앞에는 품계석이 있어 동쪽에는 문신이, 서쪽에는 무신이 품에 따라 도열을 하였구요.
아울러 바닥에는 박석을 깔았는데 중국에서는 벽돌을 까는데 반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자연석을 사용하였답니다.

 

<드무>
목조건물인 우리나라의 궁궐은 구조적으로 화재에 취약하여 역대에 많은 궁들이 화재로 소실이 되었고 이에 따라 궁궐의 화재 진압을 위하여 주요 궁궐에 드무를 놓고 물을 채워 놓았다구요.
그런데 궁궐의 소개서에 나오는'드무'라는 말이 생소하여 사전을 찾아보니 나오지 않는데 우이동에 있는 도자기 박물관에도 큰 물독을 '드무: 물독의 옛말'이라고 표기를 해놨습니다.
사전에서 단어로 찾다보니 (드므: 넓적하게 생긴 독. X드무)로 표기된 것을 보니 "드무'는 잘못된 말이고 '드므'가 맞는것 같습니다.

 

<용상>
중화전 내부에는 행사때 왕이 앉는 옥좌가 기단위에 놓여있고 그뒤에는 '일월오악도'가 그려있으며 머리위에는 '보개'가 덮여있습니다.
옥좌위에 있는 보개의 천장에는 금빛여의주를 문 황룡과 봉황, 꽃구름이 조각되어 있으며 일월오악도는 왕의 옥좌 뒤에만 놓는 병풍으로 폭포수가 떨어지고 창해가 넘실대며 한쪽에는 해와 그 다른 쪽에는 달이 있고 다섯개의 봉우리가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국토의 신들이 임금님의 후광으로 이상세계의 실현을 도와준다는 뜻이 담겨있답니다.

 

<석어당>
선조26년(1593) 선조가 피난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왔을때 모든 궁궐이 소실되어 월산대군 후손이 기거하던 저택을 행궁으로 삼아 기거하였고 그후 이자리에 석어당을 세우고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때의 어려움을 회상하며 선조를 추모하도록 하였던 장소로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이 문책당했던 건물로 덕수궁내에 유일한 2층건물로 1906년에 중건되었답니다.

 

<즉조당 및 준명당>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즉조당으로 광해군을 축츨한 인조가 즉위한 곳이며 광무8년(1904)에 소실된것을 같은해에 중건한것이라구요.
준명당은 광무원년(1897)에 다시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한때 고종황제가 거쳐했던 곳으로 외국의 사절을 접견하기도 하였으며 후에는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모시기도 하였답니다.
즉조당과 준명당은 사이에 돌기둥을 세우고 복도를 만들어 통행을 할 수 있도록 동선이 되어있구요.
-덕수궁 (2/3)에 계속-
* 참고문헌: "서울의 의미를 찾아서"와 현장의 안내문에 기재된 내용을 참조로 하였습니다.

 

kangjine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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