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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돌이

041126 덕수궁(3/3)

--덕수궁(2//3)에서 계속-
조선시대의 왕궁건립에는 나름대로 어떤 규칙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궁궐의 정문을 들어서면 서류동입하는 명당수와 이를 건너는 다리가 있다고요.
 

<덕수궁의 연못>
대한문의 보수공사를 하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는데 아마도 이 연못이 대한문 앞을 흐르는 명당수와 연결되지 않았나 생각이 들고 이 명당수에는 금천교라는 다리가 놓여 있답니다.
명당수는 터를 상서롭게 하는 풍수지리적인 의미도 있지만 입궐하는 대신들이 명당수의 깨끗한 물에 사된 마음을 털어버리고 공명정대하게 국정에 임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하네요.
아울러 이 명당수를 건너는 다리는 성스러운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을 구분하는 의미가 있다구요,


 

<세종대왕상>
대한문으로 들어와 금천교를 건너면 정면 우측에 세종대왕의 앉혀져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셨으며 또한 영명하고 어진 임금으로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분이고 특히 많은 과학기구를 발명하게 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신 분이시죠.
그런데 세종대왕은 덕수궁과는 관계가 없는데 왜 이곳에 상을 세웠는지 궁금하네요.
 

<세종대왕상의 조각 - 측우기 등>
혹시나 하고 세종대왕상을 돌아보니 좌우에는 세종대왕과 관련된 과학기구들이 조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이 상의 건립문과 관련된 사람의 이름이 석판에 새겨져 있습니다.
건립문을 읽어봅니다.
"여기 배달 겨레의 영구절대의 은인이자 인류사상 가장 발달한 글자의 유일 독창자의 영예를 지닌 세종대왕께서 겨레문화의 독립을 선언하고 한글 스물여덜 자를 반포하고 계시다
세종은 이씨조선 네번째 임금으로 서기 1397년 5월 15일에 나서 1450년 4월 8일에 가셨다. 어릴적부터 총명돈독하고 성실근면하야 글읽기와 궁리하기를 쉬지 않으셨다. 왕위에 계시기 설흔 두 해 동안에 위대한 문화정치의 공적을 이루었으니 한글의 창제 진정한 국문학의 시작 활자의 개량 학문의 숭상 국악의 정비 측우기의 발명 수표, 물시계 해시계 천체관측기 등의 발명제작은 그 중요한 것이다 국경을 개척하여 삼천리 강토를 완성하고 백성을 애무하여 국태민안 문화찬란의 황금시대를 나타내셨다
세종은 실로 겨레의식의 통일자, 문화창조의 시범자이요 학문의 대왕, 발명의 대왕이며 또 국토를 광개한 위무의 대왕이요 민생을 애육한 인덕의 대왕이시다
이 동상은 과학과 발명 창의와 성근으로써 겨레와 나라를 밝히는 꺼지쟎는 빛살을 우리의 역사창조의 앞길에 던져쏜다"로 되어 있습니다.

 

<세종대왕상의 조각-앙부일귀 등>
1968년 5월 4일에 쓴 글이라서 그런지 요즘에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을 폄하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해서 금기시하고 있는 '이씨조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것이 눈에 거슬리고 마지막에 '쏜다'라고 했는데 '쓴다'를 조각하면서 점하나를 잘못 찍어 ㅡ 를 ㅗ로 표기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아래 이 동상의 건립에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이 있는데...많이 들어보던 이름들입니다.
김 종 필 헌납
題字 김 종 필 書
명문 최 현 배 撰
김 충 현 書
조상 김 경 승 作
서기 1968년 5월 4일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 건립
서 울 신 문 사
그런데 여기에도 왜 덕수궁에 세종대왕 동상을 건립한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자격루가 이곳에 있어서..? 아니면 대한제국을 선포한 장소라서..?
 

<궁중유물관, 석조전>
덕수궁에는 석조 건축물이 있는데 이 석조전은 대한제국 때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던 곳으로 광무4년(1900) 착공하여 융희3년(1909)년에 준공을 했는데 영국인이 설계를 하였고 궁내부에서 감독을 하였으며 일본의 오구라 토목회사에서 시공을 하였답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대형건물로 정면의 기둥은 이오니아식이며 건물내부는 로코코풍으로 지었다구요.
 

<미술관, 석조전>
조선시대의 궁에 대한 글을 읽다보니 석조전유감이라며 다음과 같은 평을 하고 있습니다.
'석조전은 덕수궁에서 가장 눈에 거슬리는 존재이다. 비록 19세기에 서구에서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랐고 왕의 접견실과 침실, 거실, 목욕실 등이 구비된 신식왕궁이지만.
이 건물은 경복궁 앞마당에 버티고 서있는 조선총독부 청사처럼 식민지역사의 상징이고 옛왕조의 성전이었던 궁궐의 권위를 파괴시켜 버린 철거의 대상임을 알아야 한다. 그 앞에 조성된 정원도 청동분수대를 설치하고 그 주위에 조각품을 배치한 서양식 정원으로 고궁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사실 우리 전통양식의 고건축 기법으로 세워진 궁궐에 석조건물은 어딘가...
광복후에 이 석조전은 미소공동위원회, 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을 거쳐 지금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답니다.

 

 

<즉조당 굴뚝>
즉조당과 준명당은 돌기둥위에 복도를 깔아 통로를 만들어 놨는데 그 아래를 통하여 뒤꼍으로 가니 즉조당 뒤편에 굴뚝이 서있는데 모습이 특이합니다.
두개의 굴뚝이 나란히 서있는데 석전으로 쌓았으며 위에는 기와로 마감을 했는데 한쪽 굴뚝에는 福자로 보이는 길상문자를 넣었는데 다른 한쪽에는 없네요.

 

 

 <석등>

함녕전이나 덕홍전에서 정관헌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맨 위에는 석등 두개가 좌우에 놓여있습니다.
기단위에 석등받침을 놓고 그 윟에 석등을 앉혔는데 투박한것 같이 보이면서도 조형미가 있어 아주 친근감을 느끼게 하구요.

 

<중화전 옆의 은행잎 낙엽>
광명문 앞쪽으로 은행잎이 수북히 쌓여 있는데 그 은행잎을 밟고 걸으면 바닥에 떨어진 은행이 밟혀 깨지는 촉감과 토독~하는 소리가 재미있어 일부러 걸어다녀봅니다.
덕수궁에서 나와 지하철을 탔는데 사람들이 나를 힐긋거리며 몰래 보는 눈치네요.
내 얼굴, 또는 옷에 무언가 묻어서 그런가 했는데...
냄새, 냄새였나봅니다. 은행알을 밟고 한참으 돌아다녔으니 신발바닥에 묻어 있는 은행의 냄새가...
그렇지만 깊어가는 가을날 우리의 고궁을 둘러 보아서인지 그 냄새가 내게는 향기롭기만 합니다.
* 참고문헌: "서울의 의미를 찾아서"와 현장의 안내문에 기재된 내용을 참조로 하였습니다.
kangjine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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