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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돌이

수덕여관 이야기

얼마 전 산에 잠시 짬을 내어 갈 수 있는 곳을 산을 찾다가 수덕사도 들릴 겸 덕숭산으로 떠납니다.

수덕사야 오가며 가끔 들러보지만 같이 움직이는 집사람이 산에 오르는 것을 싫어(?) 하다보니 그 뒷산은 한 번도 오른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혼자 몸이니 절구경도 하고 산도 오르고......

수덕사의 일주문을 들어가면서 입장권을 사는데 오늘은 뒷산도 오르고 절구경도 할 계획이니 아까운 생각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오늘은 수덕여관이 주인공이니 절 얘기나 산 얘기는 여기서 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수덕여관-2009년 10월>

2009년 가을, 수덕사에 들렀다가 나오면서 담은 수덕여관입니다.

예전에 수덕사에 들릴 때도 이곳에 여관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래전에 유홍준 교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수덕여관의 뒷얘기를 본 후로는 수덕사에 들릴 때마다 이 여관을 한 번씩 둘러보곤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여관에 대한 기사나 얘기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을 주어 읽게 되고 귀를 기울여 듣게 되었습니다.

일엽스님(김일엽, 본명 김원주)은 우리나라 개화기에 여성 문학가이며 신여성의 상징으로 숱한 일화를 남기면서 세 번의 사랑을 하면서 아들 하나를 낳았고, 두 번의 결혼을 하였으나 두 번 모두 이혼하는 등 스님 자서전의 타이틀처럼 청춘을 불사르다가 1933년 이 곳 수덕사의 만공스님 문하로 들어와 출가를 하고 수도승으로 용맹정진을 합니다. 
일엽의 이야기와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유행가의 덕분으로 혹자는 수덕사를 여자스님(비구니)만 있는 절집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꽤 많다고 합니다.
그 일엽은 1971년 세수76세, 법랍 38년으로 열반을 합니다.

 

<이응로의 암각화 안내 현수막-2009년 10월>
 

<이응로의 암각화-2009년 10월>

이응로가 교도소에서 풀려나 수덕여관에 머물때 새겨놓은 암각화 입니다.

개화기의 화가 나혜석은 일엽과 함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신여성으로, 일본 유학에서 만나 귀국해서도 같이 활동을 합니다.

그미는 화려한 삶을 살며 두 번의 사랑을 하여 사별과 버림을 받았고, 한 번 결혼하지만 외간남자 (최린:독립선언 33인 중의 한사람, 후에 친일파로 변신)와의 부정행위로 이혼을 당하고, 결국에는 자식을 시댁에 남겨두고 빈몸으로 쫓겨난 이혼녀 신세가 되어 삶의 의욕을 잃고 출가를 하고자 일엽이 있는 수덕사로 향합니다.

일엽이 출가를 하겠다고 할 때 혜석은 종교를 ‘현실도피’로 도구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면박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혜석이 그 입장이 됩니다.

그러나 수덕사의 만공스님은 혜석이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라며 그 자리에서 거절을 하였고, 혜석은 수덕여관에 5년을 머물면서 출가를 시켜달라고 시위를 합니다.


<이응로의 암각화-2009년 10월> 

혜석이 수덕여관에 있을 때 일엽이 일본에서 낳은 아들(김태신: 당시 14세)이 어머니를 만나러 수덕사로 찾아왔지만 일엽은 아들에게 ‘어머니’라고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고 부르라며 냉정하게 발길을 돌립니다.
세 아이를 시댁에 남기고 온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태신이 안스러워 잠자리에 들 때 팔베게를 해주어 잠을 재워 주었고, 이후에도 태신이 찾아 올 때 마다 그렇게 해 주었는데 혜석이 이렇게 정이 많은 것을 알고 만공스님이 그미의 출가를 거절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림을 그리는 혜석은 태신에게도 영향을 주고, 혜석을 선배화가로서 누님처럼 따르면 자주 수덕여관으로 찾아 오던 이응로도 태신에게 영향을 주어 후일 스님으로 출가한 태신도 그림에는 나름 경지에 들었다고 합니다. 


<수덕여관의 우물-2009년 10월>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깊은 열정으로 서양화 공부를 하던 이응로에게 프랑스에서 그림공부를 하고 돌아온 이름난 혜석은 선배이자 스승으로, 좋아하며 혜석을 만나러 수덕여관에 자주 오게 되고 나중에는 응로도 혜석이 있는 수덕여관에서 머물기도 했답니다.
그러면서 응로는 혜석에게서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또한 프랑스의 화단에 대한 동경심을 키웠다고 합니다.

<수덕여관-2011년 10월>

2011년 10월, 수덕사를 찾았을 때에 멀리 보이는 수덕여관의 모양이 좀 이상합니다.

가까이 가보니 지붕의 이엉을 걷어내고 다시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인데, 발가벗겨진 지붕의 모습이 너무 생뚱맞아 보입니다.

이엉을 올리는 지붕의 모습이 내 머리속에 있는 어렸을 때 기억과는 너무 다른 느낌입니다.
 

<수덕여관-2011년 10월>

1944년 혜석은 출가를 포기하고 수덕여관을 떠나자, 응로는 수덕여관을 사들여 부인 박귀희 여사에게 운영을 맡기고, 한국전쟁 때는 이곳에서 피란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그립니다. 

그러다가 응로는 이화여대에서 미술강의를 하게 되는데 그때 제자인 21세 연하인 박인경과 눈이 맞아 연애를 하게 되고 1958년 응로는 그 제자와 함께 그림공부를 한다며 파리로 떠납니다.
 

<수덕여관-2011년 10월>

제자와 눈이 맞아 남편이 떠난 후 소박데기가 되어 버린 귀희는 묵묵히 수덕여관을 꾸려 나갑니다.
그러던 1968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응로가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속아 잡혀오게 되고, 대전교도소, 전주교도소 등에서 옥살이를 하는데 귀희는 교도소를 찾아다니며 응로의 옥바라지를 합니다.
그렇게 1여년을 옥살이하고 풀려난 응로는 수덕여관에 돌아와 몸을 추스르며 여관 앞마당에 있는 바위에 암각화를 새기며 시간을 때우는데 아마도 귀희에게는 이때가 가장 좋았던 시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게 시간을 때우다가 해금이 되고 여권을 다시 받게되니 응로는 귀희에게 조금의 미련도 두지 않고 1969년 곧바로 파리에 있는 인경에게로 날아가 버립니다.
 

<수덕여관 옆 조각상-2011년10월>

벌거벗은 수덕여관의 모습에 눈살을 찌뿌리며 나오는데 개울가쪽의 조각상이 눈에 띕니다.

남녀 한쌍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모습인데 뭔가 좀 어설프지만 그래도 정다워 보입니다.
지난 번에 뒤통수를 맞고 이번에는 앞통수까지 맞고도 귀희는 그냥 묵묵히 수덕여관을 지켜나갑니다.
응로가 보고프면 앞마당 바위에 새겨놓은 암각화를 바라 보았겠지요.

수덕여관에는 앞에는 ‘선미술관’을 개관하여 응로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곳의 암각화 탁본 설명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응로가 수덕여관에 쉬면서 암각을 제작할 때 박귀희(부인)여사께서 “당신 너무나 고생하시고 이제 나이도 있으니 좀 쉬지 않고 그 어려운 돌에 글자를 새긴다고 그러세요. 좀 쉬세요” 하니 고암께서 “당신은 모를꺼야, 삼라만상의 성쇠를 만들고 있네”]

그야 그렇지요, 응로처럼 사는 것이 ‘삼라만상의 성쇠’일 진데 다소곳하게 주어진 운명에 순종을 하며 사는 귀희가 어찌 응로가 말하는 ‘삼라만상의 성쇠’를 알 수 있을텐가? 

그런데 응로와 귀희의 부부가 하는 말을 누가 엿듣고 저런 안내문을 썼는지? 

다소곳하게 여관만 운영을 하는 귀희여사가 부부간에 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 했을 리는 없고, 프랑스로 날라간 응로도 그런 얘기를 했을 리는 없을 텐데...... 

 
<수덕여관 -2012년 4월> 

덕숭산 가는길에 들른 수덕여관의 지붕은 말끔하게 초가를 입혀놓은 모습입니다만 어딘지 모르게 삭막한 기운만 느껴지고 초가집의 따뜻한 채취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2009년에 담은 저 위쪽의 사진을 보면 나름 온기가 스며 있는데.
 

<이응로의 암각화-2012년 4월>

저 위 그림에 보이지 않는 암각화 부분입니다.

1989년, 응로는 호암갤러리에서 귀국 전을 준비 하던 중에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의 장례식에 귀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뒤통수도 모자라 앞통수까지 맞은 소박데기를 어느 누가 장례식에 불러주겠느냐고 하겠지만 그래도 마지막 이별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네 인지상정이고, 시간이 흐르면 큰댁 작은댁은 형님 아우하면서 살건만 인경은......
그 시간, 수덕여관 툇마루에 걸터앉아 앞마당의 암각화를 바라보고 있었을 귀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니 그려집니다.

<동자상-2012년 4월>
암각화를 담고 눈을 돌리니 옆에 있는 바위에 조그만 동자상이 놓여 있습니다.
어린 몸이지만 암각화의 '삼라만상의 성쇠'를 알려고 노력하는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네요.

유홍준 교수는 1993년에 발간된 답사기에서
“그렇게 버림받은 고암의 본부인은 초가집 수덕여관을 지어 운영하면서 오늘 이때까지 조용히 수절하고 계신다. 그러나 남편에 대한 원망이나 섭섭함이 조금도 얼굴에 비치지 않는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출가를 거부당하고 수덕여관에서 시위(?)를 하다가 제풀에 떠난 혜석은 이리 저리 유랑생활을 하다가 1948년 서울시립병원의 영안실로 무연고 시신이 되어 들어옵니다.

<수덕여관 -2012년 4월> 

수덕여관의 원래 출입구인 사립문쪽으로 나오면서 뒤돌아 보니 다리도 있고 사립문도 있어 좀 나아 보였습니다. 

2001년 한 많은 세상을 살던 귀희는 세상을 떠나고 수덕여관은 문을 닫습니다.

귀희가 세상을 떠나면서 일엽, 혜석, 태신, 응로 등 수덕여관에 얽혀있던 이름들은 얘기속으로 만 남겨집니다.
수덕여관은 수덕사의 손으로 넘어가 사람 냄새가 없는 전시물이 되고, 앞마당의 암각화는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도 좀 한다는 식자들은 ‘삼라만상의 성쇠’라는 선문답까지 곁들여 걸작이라는 허울을 쒸워버립니다.
어떤 면에서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걸작인지 설명 한 줄 없이......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그 때의 선사시대의 살아가는 모습을 알려주는 중요한 표석이나 되지만 이 돌은?


수덕여관, 개화기 신여성들의 자유분방함과 순종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조선여인의 삶과 애환의 맛물리는 길목이었지만 지금 이들의 흔적은 희미지고, 이제는 가슴 저린 귀희의 얘기보다는 응로와 암각화의 선전무대가 되어 있습니다.

<얼굴-2012년 4월>

덕숭산에 올랐다 내려오면서 길가에 놓여 있는 이런 저런 조각품들을 둘러보며 눈팅을 합니다.

그런데 '얼굴'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작품하나가 눈에 들어오네요.
아마도 수덕여관 개울가에 정답게 어께동무를 하고 있는 뒷모습 조각품의 얼굴이 궁굼했던 모양입니다.
(어깨동무 뒷모습의 조각품은 '좌선'이라는 작품인데 내 나름으로는 앞 모습이 별로 여서 뒷모습만 담았습니다.)

이제는 아무것도 그리워 말자
생각을 하지 말자
세월이 오가는 길목에 서서
천년바위 되리라......

응로의 ‘삼라만상의 성쇠’보다는 주병선인가 박정식인가 하는 가수가 부른 ‘천년바위’라는 노래 한 소절이 더욱 인간적이고 철학적인것 같습니다. 

강지니의 세상돌이, 오늘은 수덕여관을 둘러보았습니다.    kangjine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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