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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둘러보기

경주 괘릉(070114), 사적 제 26호-보물 제 1427호

울산에서 경주로 가다보면 불국사 입구를 못 미쳐 "괘릉"의 안내표지가 눈에 띕니다.
안내표지를 따라 소로길로 접어들어 조금 들어가니 괘릉을 만나게 되고 그 정문앞 공터에 주차를 하고는 안으로 들어갑니다.
입장권을 사려고 둘러보니 매표소로 보이는 창구에 무료입장이라는 안내문이 있는데 아마도 예전에는 입장료를 받았던 모양입니다.


<괘릉 정문>
괘릉은 신라 제 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유해를 모신 곳으로 추정되는데 릉의 규모는 밑둘레70m, 지름21.9m, 높이 7.7m이며 릉을 둘러 싸고 있는 호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를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는 구조입니다.


<괘릉>
원형의 봉토를 둘러싸고 있는 호석은 아래부분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판석을 올리고 그 위에 다시 갑석을 얹었으며 각 판석사이에는 호석이 무너지지 않도록 탱석을 끼워넣었으며 2개의 판석마다 12지상을 새긴 판석을 하나씩 끼어 넣어습니다.
또한 호석의 바깥쪽 바닥에는 부채꼴의 판석을 정연하게 돌려 깔았으며, 봉토 주변을 둘러 석주(石柱)를 세우고 석주와 석주 사이에 2개씩 돌난간을 끼웠 넣었고요.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괴어 널(棺)을 걸어 묻었다는 전설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규모의 왕릉은 미리 미리 준비를 할 텐데... 물이 고인 묘소에 왕을 묻었다는게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러려니 합니다.

<혼유석>
릉의 앞에 놓여 있는 석상(石床)인데 다른 왕릉의 안내문에는 혼유석이라고 표기 되어 있습니다.


<십이지신상-말-오(午)>
호석에 있는 십이지신상을 둘러봅니다만 너무 햇볕이 강하고 그림자가 끼어 신상의 모습을 자세히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괘릉을 검색하여 보니 십이지신상의 배열에 대한 설명이 있어 이것을 참조로 십이지신상에 이름을 붙여봅니다.
<오상(午像)만이 정면(남쪽)을 보고 있다. 또 자축인묘진사(子丑寅卯辰巳)의 6상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고 미신유술해(未申酉戌亥)의 5상은 왼쪽을 향하고 있다. 즉 양 측면에서 모두 오상을 향하여 머리를 두고 있는 배치를 취했다>라고 되어 있어 릉의 남쪽에 있는 위의 그림을 말(午)의 신상으로 보입니다.
검색한 글에는 위 내용에 덧붙여 <봉분 주위에 이렇게 12지신상을 배치한 것은 신라 특유의 양식이며, 특히 괘릉의 12지신상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는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된다.>고 되어 있는데 안목이 모라자 자세히 살펴 보아도 이 십이지신상이 그렇게 우수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십이지신상-쥐(子)>

<십이지신상-소(丑)>

<십이지신상-범(寅)>


<십이지신상-토끼(卯)>


<십이지신상-용(辰)>


<십이지신상-뱀(巳)>
여기까지의 신상들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말(午)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아래로는 말(午)의 좌측에서 고개를 우측으로 돌려 말을 바라보고 있는 신상의 모습입니다.


<십이지신상-돼지(亥)>


<십이지신상-개(戌)>

<십이지신상-닭(酉)>

<십이지신상-원숭이(申)>



<십이지신상-양(未)>
릉의 봉분앞에는 돌사자, 문인석, 무인석 및 화표석 등의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통일신라시대 석조물로는 그 조각수법이 극히 우수하여 보물 제 142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봉분의 앞쪽에는 한 쪽에 두 마리씩의 돌사자 네마리가 주변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동편의 북쪽 사자>
동편의 북쪽, 즉 봉분 앞쪽에 자리하고 있는 돌사자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북쪽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동편-남쪽의 돌사자>
동편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돌사자는 정면, 즉 서쪽을 바라보며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서편의 북쪽 돌사자>
서편의 북쪽, 즉 봉분의 앞쪽에 자리하고 있는 돌사자는 정면을 향하고 있어 동쪽을 경계하고 았습니다.


<서편의 남쪽 돌사자>
서편의 뒤쪽, 즉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돌사자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어 남쪽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문인상-동편>
사자상 다음에는 문인상 1쌍이 좌우에 시립하고 있습니다.


<문인상-서편>
일반적인 문인상을 나약한 모습이지만 이 괘릉의 문인상은 우람한 몸집에 강건해 보이는 모습으로 좀 대조적입니다.


<무인상-동쪽>
문인상 뒤에는 무인상 1쌍이 좌우에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인상의 외모는 부리부리한 눈에 굵직한 선과 윤곽 등 평범해 보이지 않는데 안내문에 보니 서역인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무인상-서편>
이 때에도 서역인들과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화표석>
무인석의 뒤에는 화표석, 또는 망주석이라고 불리는 돌기둥 한 쌍이 서있습니다.
역할은 이 곳에 릉이 있다는 표지의 역할이라고 합니다.
경주를 오며 가며 신라시대의 왕릉을 둘러보곤 했지만 대부분 커다란 봉분과 석상, 그리고 몇 점의 석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괘릉은 참 재미있게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날씨가 흐린날 다시 한번 찾아와 십이지신상을 자세히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능을 나서 석굴암으로 향합니다.
(2007년 5월 1일, 비가 오고 난 후 흐린 날씨에 경주에 가다가 괘릉에 들려 12지신상을 다시 담아서 지난번 사진과 교체하여 올려 놓았습니다.)



<석굴암에서 본 동해>
토함산에 올라 석굴암을 둘러봅니다.
석굴암과 그 주변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어 유리에 갇혀있는 석굴암도 제대로 볼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인공조명 아래에 자리를 하고 있는 석가여래의 모습이 유리감옥에 갇혀있는 것 같아 괜히 안스럽기만 하고 또한 그 주변의 다른 걸작품은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제대로 관람도 못하는 이 석굴암을 이렇게 개방을 할 바에야 모형을 제작하여 각 작품에 대한 설명이라도 제대로 하고 모든 불상 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게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씁쓸한 마음으로 밖에 나와 여래가 향하고 있는 동해쪽(아마도 대왕암 부근으로 생각되는)을 카메라에 담다보니 문득 이런생각이 듭니다.
주차료 2000원에 관람료 4000원, 6000원을 징수하기 위해 유리에 갇혀있는 석굴암을 공개하는 것은 아닌지?
유리감옥에 갇혀있는 석굴암을 둘러본 아이들의 석굴암에 대한 느낌은 어떨지 문화재관리자들은 생각을 해보았는지 궁금합니다.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