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재 둘러보기

석조미륵삼존불(삼화령애기부처)-경주박물관

경주박물관의 전시실에는 석조미륵삼존불상이 자리를 하고 있는데 먼저 안내문을 읽어 봅니다.


<석조미륵삼존불상>
"이 석조미륵삼존불상은 1925년 경주 남산의 장창골에서 옮겨온 것으로 좌우협시보살의 표정이 너무도 천진남만하여 '아기부처'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통통하면서도 탄력있는 모습 등에는 북제(北齊)나 수대(隋代)의 조각양식이 반영되어 있으나, 부드러우면서도 온화한 조형상은 신라 특유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경주 배리삼체석불과도 직결된다. 또한 이 삼존불은 본존이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로서 미륵불로 보고 있으며 볼에 비해 머리와 손발이 큰 점이 특징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본존미륵불>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본존불입니다.
유홍준교수의 문화답사기의 삼화령애기부처 이야기를 개략적으로 엮어봅니다.
이 석조미륵삼존불상의 정식명칭은 황수영박상에 의하여 "생의사生義寺미른삼존상"으로 밝혀졌는데 바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그 삼존불상이라고합니다.
경주 남산의 삼화령 고개에 있던 것을 1925년에 본존불을 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왔고, 또 민가에서 홈쳐간 협시보살 2구도 되찾아 왔다고 합니다.
기록에는 선덕여왕 13년(644)에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모두 4등신으로 어린아이의 신체 비례를 하고 있으며 그 앳된 얼굴의 해맑은 웃음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 시대의 가장 사랑스런 유물이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좌측 협시보살>
좌측에 서있는 협시보살은 비록 코가 깨졌지만 불심(弗心)과 동심(童心)이 절묘하게 배합된 모습으로 삼화령고개에 오른 사람들은 이 애기 모습의 보살상을 보면 얼굴을 쓰다듬고 손을 매만지곤 했는데 그 이름도 "삼화령애기부처"라고 불렀답니다.
위 애기부처의 발가락 부분이 까맣게 되어있지요?
유교수가 당시 경주박물관장이던 "소불 정양모"선생께 그 이유를 물었더니 웃으면서 그 앞에서 몇 시간 서있으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 그 앞에서 지켜보았다네요.
당시 많은 초등학교 학생들이 담임선생의 인솔하에 박물관을 찾아 오는데 인솔 선생은 빨리 가라고 재촉을 하고 박물관의 관리아저씨들은 아이들이 유물에 손을 대지 못하게 감독을 하고 있으니 아이들은 별로 재미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당시에 마지막 전시실인 이 불상에 있는 방에 들어오면 아이들은 "쟤 좀 봐, 쟤 좀 봐", "우와! 귀엽다. 우리 애기 같다."하며 수근 거리고는 지키고 서 있는 관리아저씨의 눈을 피애 잽싸게 뛰어 들어가 발끝만 얼른 만지고 뛰어나오곤 하더랍니다.
그 덕분에 애기부처의 발가락만 애들의 손때가 묻어 까맣게 되었다네요.


<우측 협시보살>
유신 말기인 1979년에 미국의 8대 도시를 순회하는 "한국미술 5천년전"이 기획 되었답니다.
이 유물전은 우리문화를 해외에 소개하는 취지보다는 한국의 인권상황이 극악하다는 세계여론의 무마 차원에서 기획된 것이었는데, 이 전시회에 삼화령 애기부처도 차출되어 이때 비로소 하이타이로 삼일간 닦아내는 세수를 하였고 그 결과 도록마다 애기부처의 사진이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사전에 읽어서 그런지 이 미륵삼존불상 앞에 서서 가만이 들여다 보니 정말로 토실 토실 한 얼굴과 거기에 배어 있는 웃음이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해 보입니다.

kangjinee......^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