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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돌이

연풍성지 (050414)

2005년 4월 14일
태릉성당의 여성 구역장, 반장이 연풍성지를 찾아갑니다.
연풍의 주차장 바로 옆에 '연풍성지' 표석이 서있습니다.


<연풍성지표석>
연풍은 초대 교회부터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던 뿌리 깊은 마을로 연풍과 새재 주변의 마을마다 순교 역사가 어려있는 곳이랍니다.
이곳이 초대 교회 때부터 교우촌이 형성된것은 서울, 경기를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하여 교우들이 지리적으로 험한 산지에 둘러 쌓여 있어 이곳으로 오기도 했지만 경상과 충청도의 접경지로 도계르 넘어서서는 수사를 하지 못하는 조선시대의 사법체제도 즉 충청도에서 쫒기던 교우들이 경상도로, 경상도에서 쫒기던 교우들은 충청도로 피신이 쉬웠다는 것도 한 몫 했을 거라고 이곳의 신부님은 설명을 합니다.


<연풍성지내 표석>
연풍성지는 1963년 옛날 향청 건물을 사들여 공소로 사용하였으나 당시에는 순교터인줄을 몰랐으나 논과 집터를 정리하면서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인 형구돌이 3개 발견되었고 또한 1968년 시복식 후 황석두 성인의 교향이 연풍으로 들어나면서 성지개발이 가시화 되었고 1979년 평해 황씨 문중산에 묻힌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확인, 1982년 연풍성지로 이장을 하였답니다.


<예수님상>
성지에 들어서자 예수님 상이 눈에 들어 옵니다.
연풍성지에 관련된 중요한 인물로는 최양업 신부가 있답니다.
김대건 신부와 같이 마카오에 유학을 하여 13년의 각고 끝에 사제품을 받은 후에 1848년 부터 12년간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의 신앙을 꽃 피우다가 새재마을인 문경 진안의 어느 주막에서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했고 배론 신학당 뒤산에 옮겨져 묻혔답니다.

<대십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그리고 성모님, 사도요한의 모습은 복음말씀에 따라 재현한 것이랍니다.
대형 십자가가 있는 이 부근은 사형장(혹은 옥터)라고 부른다네요.
천주교를 믿다가 잡혀온 교우들이 형방건물에서 갖은 고문을 당한 후 배교하지 않으면 이고세서 처형을 한곳이라구요.
1869년 김요셉(68세)이 치명 순교했으며 전바오로(23세)가 형구돌로 순교하였고 많은 이름모를 순교자들의 피 흘림이 있던 순교터랍니다.
성지내의 화단에 조경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성모 마리아 상>
이곳의 신부님이 설명을 하신던 중 농담 섞어 한 마디 합니다.
대십자가도 그렇고 성모상도 그렇고 모두 크게 만든것은 오신부님(아마도 오기선 요셉 신부님)이 작게 만들면 자주 옮겨 다니거나 누군가가 치우지 못하게 모두 크게 만들으셨을 것이라고...
대십자가도 그렇고 성모님상도 다른것에 비하면 상당히 크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다섯성인상과 반석>
1866년 3월 14일 충청도 내포지방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당하던 다불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및 황석두 루가 회장에게 아산 음봉면 삼거리에 있던 반석에서 포졸들이 떡과 술을 대접하였고 동년 3월 23일 사형언도를 받고 형장인 충남 보령의 갈매못으로 갈 때 장주기 성인도 함께 압송되었는데 이 반석에서 다블뤼 주교께서 백성들 사이에 비밀히 끼어있던 교우와 포졸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이 반석에서 마지막 강론을 하고 다섯 성인은 감사의 성가를 부르며 순교지로 압송되었답니다. 실제의 반석은 절두산 성지로 옮겨 보관하고 있구요.

<황석두 루까 성인상>

부유한 양반집의 선비로서 과거길에 교리를 듣고 돌아와 부친의 엄격한 반대에 3년동안 벙어리 노릇을 하면서 집안 식구들을 모두 영세 시켰으며 패롱권신부와 다블뤼 주교님의 비서로서 성서번역과 저술, 판각을 하고 교회사료 수집을 도왔답니다.
신앙에 눈뜬 뒤 부부 별거로 정결을 지키는 생활을 하였고 페레올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려 하였으나 부인이 있을 종신 허원의 수녀원이 없어 교황청의 허락을 얻지 못했다구요.


<황석두 루까 성인 묘>
1866년 3월 11일 당진 세거리, 거더리에서 다불뤼주교, 오메트르신부, 위행신부가 체포당하자 "나도 잡아가라! 저분들은 나의 스승이며 그분들이 살면 나도 살고, 죽으면 나도 죽겠다."고 하여 같이 체포당하여 갈매리에서 동년 3월 30일에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순교의 칼을 받았답니다.
그분의 유해는 양아들에 의해 연풍 정안면 방곡리 고향으로 모셔 졌고 1982년에 연풍성지로 다시 모셔졌다고요.
여기 신부님의 말씀으로는 양자가 루까성인의 유해를 선산에 묻었는데 표시가 날까봐 봉분을 만들지 않았으며 1979년 유해를 확인했는데 엎어서 매장을 되었고 이는 그 당시의 관례가 역모로 죽은 사람들은 그렇게 묻었다는데 그 아들도 관습은 버리지 못한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아울러 유골을 전문 기관에 의뢰하여 교수형 당한 것을 확인하였다고요.


<순교현양비>
연풍성지는 정조 15년(1791) 신해교난으로 이곳에 은거하던 가톨릭 교인 추순옥, 이윤일, 김병숙, 김말당, 김마루 등이 순조1년(1801) 신유교난 때 처형당한 곳이며 이때 유일한 목자이던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주요 창립자들을 잃게된 교우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곳이 천혜의 은거지가 되어 교우촌을 이루었으며 우리나라 최초 동정부부이며 끝까지 신덕을 지키며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의 어머니와 올케가 박해로 인하여 의지 할데가 없자 이곳 연풍으로 이사왔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형방건물>
연풍은 현감이 있던 고을로 행정을 보좌하던 자치기구의 하나가 1632년(인조10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의 연풍형방이며 교회 박해중 끌려온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심한 고문을 받던 곳이랍니다.
일제 때는 헌벙보조 사령부로 해방 후 연풍지서로 사용되던 것을 1936년에 교회에서 매입, 공소로 하용되었으며 1995년 원형을 살려 복원을 하였구요.

<형구돌>
병인박해(1866)때 순교자들을 소리없이 죽이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만들도록 명을 내림으로서 만든것이'형구돌'이랍니다. 밧줄을 건 교우의 목이 앞 구멍에 놓이면 반대편 구멍에서 줄을 잡아당겨 죽이던 잔혹한 형구이지만 '하느님께 죄를 짖느니 차라리 축음을 택하겠다.'며 신앙을 지킨 신앙선조들의 믿음이 배인 거룩한 돌이라구요.
연풍성지에서 발굴된 형구돌은 모두 세개로 첫번째것은(1963년) 절두산 성지에 두번째(1972년)는 형방건물 정면에 세번째(1992년)의 것이 이것이랍니다.



<풍락헌>
연풍 초등학교 내에 있는 연풍의 동헌으로 정면5 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연풍성지 공소>

<특별 미사>
신부님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십니다.
우리 순례단을 위해 신부님이 특별 미사도 드리고요.



<황석두 루가 성인의 목뼈>

<황석두 루가 성인의 칠성판 일부>



<성 오메뜨르 신부의 유해>



<신부님의 야외 특강>
미사를 마친 후에 성지에서 준비한 맛있는 산채 비빔밥으로 점심을 하고 황석두 루까 성인의 묘에서 그 분의 생애와 연풍성지에 대해 신부님의 특강을 들었습니다.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