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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돌이

영휘원과 숭인원(050315)-홍릉

2005년 3월 15일...
세종대왕 기념관을 나와 홍릉을 찾아 갑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데 '홍릉'의 안내판은 보이지 않고 '영휘원'이라는 안내판이 보입니다.
정문옆에 매표소가 있어 그리로 가서 물어보니 '홍릉'은 옛날 이름이고 지금은 영휘원이라구요.
이해가 되지 않아 매표원을 쳐다보고 있으니 왕이나 왕비의 묘는 릉이고 후궁의 묘는 원이랍니다.

<영휘원의 배치도>
원래는 고종황제의 비인 명성황후가 일본넘들에게 시해 당하여 여기에 모셔 홍릉이었으나 고종황제가 승하하신후 1919년 명성황후를 남양주시에 있는 금곡으로 옮겼답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홍릉이라고 부른다고요.
고등학교 때 이 동네에서 살았는데도 이곳에는 들어와 보지 않아 이런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구요.
이 자리에는 고종황제의 후궁이며 의민황태자 영왕의 어머니인 순현귀비 엄씨의 묘인 영휘원과 의민황태자의 장자인 이진의 묘인 숭인원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영휘원 전경>
영휘원의 앞에는 홍살문이 있어 엄숙함을 풍기고 그 안으로는 신도와 어도가 단차를 두고 깔려 있습니다.
순헌귀비 엄씨는 명성황후가 일본넘들에게 시해당한뒤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신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양정학교와 진명여학교를 설립하였고 숙명여학교의 설립에 많은 기부를 하여 근대 사학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신 분이랍니다.



<정자각>
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丁자 모양으로 된 맛배 지붕의 건물입니다.
지붕에는 세개의 잡상이 앉아 있구요.



<비각>
신도비가 있는 비각입니다.



<신도비>
죽은이의 생애를 기록한 바석이라는데 '신도비'를 검색해봅니다.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놓은 죽은이의 생애에 관한 사항들을 새긴 비. 무덤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운다. 한(漢)나라 양진(楊震)의 고대위양공지신도비(故大尉楊公之神道碑)에서 시작되어 종 2 품 이상의 관계(官階)에 있던 사람에 한하여 세웠다. 한국의 신도비는 조선시대 태조의 건원릉신도비(建元陵神道碑)와 세종의 영릉신도비(英陵神道碑)가 있다. 또한 2품 이상에 한하여 세우는 것으로 제도화하였으나 문종은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는 것을 금지하였다. 한편 공신이나 석유(碩儒) 등에 대하여는 왕명으로 비를 세우게 하였다.>
어제(2005년 4월 15일) 둘러본 방학동에 있는 정의공주 묘에도 부마의 신도비가 있더군요.

<영휘원 묘역>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자세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안내서에 보니 봉분에는 곡장이 둘러지고 석물은 양, 호랑이, 말, 상석, 망주석, 장명등 등이 배치되어 있답니다.
(맨위에 있는 영휘원 안내도 참조)
영휘원을 둘러보고 숭인원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숭인원 전경>
숭인원도 영휘원과 같이 입구에 삼태극 홍살문이 엄숙함을 풍기고 있습니다.
영휘원과 다른 것은 정자각 앞의 보도가 하나입니다. (영휘원은 신도와 어도로 구분됨}


<정자각>
제사를 모시는 정자각인데...
영휘원은 말끔하게 칠이 되어있는데 숭인원은 좀 그러네요.
예산 때문인가요?


<비각>
숭인원의 주인인 이진은 고종황제의 네째 아들인 의민황태자 영왕의 큰 아들인데 1921년 일본에서 태어났으나 1923년 의민황태자가 귀국했을 때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답니다.


<신도비>
이에 순종황제의 명에의해 이곳에 묻히고 숭인원이라 했으며 전체적인 구조는 영휘원과 비슷하게 되어 있다구요.



<묘역>
대부분의 릉이나 원이 그렇듯이 이곳의 묘역이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고 출입이 통제되어 육안으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문화재의 관람료가 슬그머니 올랐네요.
작년까지는 창덕궁을 빼고 궁궐은 500원, 릉이나 묘는 3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이곳의 입장료가 1000원입니다.
누구나 쉽게 접근을 하도록 하여 우리의 문화를 알려야 할 텐데 너무 올린것이 아닌지?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