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돌이

041218 창경궁(2/3)

--창경궁(1/3)에서 계속입니다.-
명정전을 지나 뒤편으로 돌아와 그 좌측(남쪽)에 문정전이 있는데 동향인 명정전을 등지고 앉아 있습니다.


<문정전>
문정전을 임금의 일상업무를 보던 편전으로 광해군 때 재건하면서 명정전과 같이 동향으로 하고 기둥도 격을 높여 둥근기둥으로 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었으나 옛것을 존중하자는 중론에 따라 남방의 사각기둥으로 복원된 일화가 있다고 합니다.


<문정전 용상>
문정전은 1930년대까지 옛모습 그대로 존속했던것을 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고적도보>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후 언제부터인가 빈터로 남아 있다가 1986년 오늘날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답니다.
문정전 내부의 뒷편 중앙에는 용상이 자리하고 그 뒤에는 일월오악도의 병풍이 쳐져 있습니다.


<숭문당>
문정전의 우측(서쪽)에는 숭문당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숭문당은 경종 때 건립되어 순조 30년(1830)의 큰불로 소실된것을 그해 가을에 중건한 건물이랍니다.
이름 그대로 유학을 숭상한다는 뜻을 담은 건물인데 영조는 이곳에서 친히 성균관 학생들을 불러 접견하여 험하기도 했고 때로는 주연을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했다구요.
정면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과 새 날개 모양의 익공식 공포로 장식을 했다네요.
또한 숭문당이라는 현판과 그 안에 걸려진 '일감재자'는 영조의 친필이랍니다.


<빈양문>
다른 왕궁은 치조 공간인 외전과 연조 공간인 내전이 엄격히 분리되어있는 것과는 달리 창경궁은 정전인 명정전의 뒤면에 벽이 없는 행각을 설치하여 빈양문을 통하여 내전으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함인정>
빈양문을 나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함인정입니다.
현장의 안내문에 의하면 이곳에는 성종15년(1484)에 지은 인양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가 인경궁의 함인당을 이곳에 옮겨 세우고 함인정으로 이름을 바꿨다네요.
왕궁을 보며 안내서로 보고 있는 '서울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자에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것이 아니고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것을 인조 때 복원하면서 함인당을 이곳으로 옮기고 함인정으로 했다고 합니다.
영조는 문무과거에 장원급제한 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고요.
정면3칸, 측면3칸의 단층건물로 처마의 지탱을 위한 공포는 이익공식이며 겹처마의 팔작지붕의 형식을 취하고 있답니다.
함인정에는 마루에는 궁중에서 사용하던 교의, 일월오악도병풍, 보안, 서안, 연상, 어사화 등의 집기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천정에는 서액 등이 걸려있어 옛 궁중생활을 엿볼수 있습니다.


<경춘전>
함인정 서쪽에 있는 경춘전은 성종때(1484) 창건 때 내전으로 지은 건물인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광해군(1616)때 다시 지었으나 순조30년(1830)에 다시 소실되어 3년뒤 중건한것으로 현판은 순조의 글씨라고 합니다.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장희빈에 수모를 당했던 인현왕후, 한중록을 쓴 혜경궁 홍씨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고요.
궁궐지에는 혜경궁 홍씨가 이곳에서 정조를 낳기 전날밤 사도세자가 꿈속에 용 한마리가 경춘전 침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경사의 징조라 해서 동쪽 벽면에 꿈에 본 용을 손수 그려놓았다는 일화가 소개되어있답니다.
주춧돌의 면과 면을 맞춘 세벌기단위에 세웠고 팔작지붕에 이익공의 양식을 택한 건물이랍니다.

<환경전>
환경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것을 중건하였으나 인조2년(1624) 이괄의 난에 소실되어 중건하였으나 순조30(1833)에 소실되어 3년 후에 다시 지은것으로 임금이 생활하던 곳이라 합니다.
중중이 이곳에서 승하를 하였고 순조의 효명세자 문조(추존)의 승하 때에는 발인 때까지 관을 두던 빈궁으로 사용했다구요.
경춘전과 동일한 기법으로 세워진 건물이랍니다.



<통명전>
보물 제 818호인 통명전은 건립후 여러차례의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순조34년(1834)에 지은 것이며 현판의 글씨는 순조의 것이라 합니다.
통명전은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내전의 건물로는 제일크고 유일하게 월대를 두어 격식을 높였으며 그 위에는 드무를 놓았고 팔작지붕에 익공의 공포를 적용한 건물이며 왕비의 침전이라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답니다.
장희빈이 여기에 재웅, 새, 고기 등을 묻어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하였고 끝내 궁녀를 매수하여 왕후에게 꿀을 넣은 게젓(게장)을 먹이여 승하하게 하였고 이로 인해 지는 사약을 받아 죽었다네요.
또한 1762년 오월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8일만에 죽게하고 3년뒤에 자신의 비정한 마음을 뉘우치며 죽은세자를 생각하며 슬퍼한다는 의미의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내렸다구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창경궁 건너편(서울대학병원자리)에 있는 함춘원에 경모궁을 세우로 비참하게 돌아가신 생부의 한을 달랬으며 그 묘궁울 항상 바라볼 수 있는 자리인 통명전 위 높은 언덕받이에 자경전을 지어 어머니 경의왕후(혜경궁홍씨)를 모셨으며 자신도 거처를 창경궁으로 옮겼답니다.
수원에 있는 아버지의 묘인 융릉에도 잦은 능행을 하였고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한한 후 자신도 아버지 옆에 묻혔답니다.

<통명전 서쪽의 연못>
왕비의 처소답게 통명전 옆에 연못을 조하고 다리를 놓았으며 주변의 산자락을 화계로 처리하여 아름답게 꾸몄다고요.


<통명전 서쪽 연못>
연못의 주위에는 정교한 돌단간이 둘러 있고 연못안에는 괴석 몇점을 놓았으며 연못 북쪽에 보이는 조그만 샘에서 나오는 샘물을 연못으로 유도하여 하여 정원의 운치를 한층 덧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그 샘에는 누군가 조롱박을 켜서 만든 바가지를 갖다 놓아 샘물을 마실수 있도록 배려를 했네요.
겨울에 마시는 샘물 맛은 그 바가지로 인하여 한층 더 하게 하는것 같습니다.

<양화당>
양화당 역시 왈비의 생활공간으로 임진왜란, 이괄의 난, 병자호란과 순조 때의 화재로 불에 탄 것을 183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판은 순조의 글씨랍니다.
남한산성에서 돌아온 인조가 이곳에 거처하기도 하였으며 철종비 철인왕후가 여기서 승하했다고요.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집으로 익공의 공포에 팔작지붕을 얹은 건축양식으로 되어 있답니다.

--창경궁(3/3)으로 계속됩니다.--

kangjinee......^8^


'세상돌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041228 경희궁  (0) 2005.03.28
041218 창경궁(3/3)  (0) 2005.03.17
041218 창경궁(1/3)  (0) 2005.03.16
031218 종묘(3/3)  (0) 2005.03.16
041218 종묘(2/3)  (0) 2005.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