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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524호 이윤탁한글영비-한글고비

2007년 8월 29일,
서울공릉동에 있는 원자력병원 뒷길의 공릉터널을 지나 은행사거리로 가는 왕복 6차선의 길(지금 명칭은 한글비석길)을 지나다가 보니 우측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한 한글고비 안내판을 만납니다.
차를 길가에 세우고 올라가니 한글고비 안내판이 서있고 묘 한구와 석물들, 그 옆에는 조그만 비각이 묘비 하나를 품고 서있습니다.
1990년대 중반으로 기억되는데 6차선으로 잘 뚫린 이 길에서 기분을 조금 내면서 속도를 내다보니 갑자기 차선 하나가 없어지고 언덕이 툭 튀어 나와있어 깜짝 놀라 급 브레이크를 잡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슨 이씨 묘인데 문중에서 이전을 반대하여 도로가 완공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한참 뒤에 가보니 묘는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고 길은 정상적으로 개통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글 영비각>
이 비는 조선 중종 때 승문원(承文院) 관원을 지낸 이윤탁(李允濯, 1462∼1501)과 신씨(申氏) 부인을 합장한 묘 앞에 서 있는 비로, 묘를 훼손하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내용이 한글로 적혀 있답니다.
비는 사각의 받침돌 위에 비몸만을 세워둔 간결한 구조로, 비몸의 윗변 양쪽을 비스듬하게 다듬었는데 이윤탁의 셋째 아들인 이문건이 글을 짓고 글씨를 새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요.
그런데 비각안쪽에 있는 비석 사진을 담으려니 잘 되지 않습니다.
비석에 비해 비각이 좁아 전체를 잡기가 힘들고 또 비각이 어두운데다 비석마저도 좀 어두운 색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다행히 묘지 앞에는 한글고비의 복제품을 세워 놓았는데 뒤쪽의 비문과 좌, 우측의 비문의 내용을 한글로 새겨서 누구나 읽어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해 놓았습니다.

<보물 제 1524호 이윤탁한글영비 전면-한글고비>
앞면에는 "권지승문원부정자이공휘윤탁(權知承文院副正字李公諱允濯) 안인신씨적고령(安人申氏籍高靈) 합장지묘(合葬之墓)"라 새겨 부부의 합장묘임을 밝히고 있답니다.

<보물 제 1524호 이윤탁한글영비 후면-한글고비>
뒷면에는 "고비묘갈음지(考 墓碣陰誌)"라는 제목으로 부모의 묘지를 새겼는데, 말미에 "가정십오년병신오월립(嘉靖十五年丙申五月立)"이라 하여 중종 31(1536)에는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답니다.
정리하면 신씨부인이 15357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양주(楊州) 노원(蘆原) 율이점(栗伊岾)에 무덤을 쓰고, 이듬해 봄 가까운 곳에 있던 이윤탁 묘와 합장하여 5월 비를 세웠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보물 제 1524호 이윤탁한글영비 후면-한글고비>
이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90년이 지난 후로 쓰여진 글씨는 한글창제 당시와 똑같은 글씨에 서민적인 문체라고 하는데 남아있는 ‘한글비’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아직 한글이 널리 사용되지 못했던 시기에 과감히 ‘한글묘비’를 세웠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돋보인다고요.

<보물 제 1524호 이윤탁한글영비 좌측면-한글고비>

이 비에 한글을 새겨놓은 상황을 꾸려봅니다.
이문건이 아버지 이윤탁이 죽자 공릉동에 있는 야산에 묘를 조성했는데 조선 11대 왕인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가 죽자 이 부근이 그녀의 묘역인 태릉으로 지정되면서 이윤탁의 묘가 강제 수용되었던 모양입니다.
당시에 나름대로 한 가락하던 문중에서 왕실의 끗발에 밀려 부모의 묘지를 빼앗겼으니 말은 못하지만 얼마나 속이 쓰렸는지는 안 봐도 훤합니다.
대 놓고 말 못할 그 원통함의 속내를 남 모르게 후세에 드러내고 또한 후일에 이 묘를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할 마음으로 비의 양 측면에 한글과 한문으로 경고문을 써놓은 모양입니다.
뒤에 어떤 글을 보니 이 도로 공사 중에 묘의 이전이 늦었던 것은 문중의 반대 보다는 근로자들이 비문에 적혀있는 경고문에 대한 얘기를 듣고는 겁을 내어 묘와 비석에 손대기를 꺼려하여 공사가 지연되었다는 내용이었는데 한글 경고문이 제 역할을 해 낸 것으로 보이고요.


<보물 제 1524호 이윤탁한글영비 우측면-한글고비>

우측면에는 이 비의 핵심으로 한글로 쓴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위 사진의 좌측에 붙여 놓은 것으로<이비석은 신령한 비석이다. 비석을 깨뜨리거나 해치는 사람은 재화(災禍)를 입을 것이다. 한자(漢字)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한글로 알린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비석의 경고문을 한글로도 써 놓은 것은 한문을 모르는 일반인들도 이 경고문을 읽고 묘와 비석을 훼손하지 못하게 하려는 깊은 뜻이 담겨있는데 그 덕분에 당시의 한글형태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고 2006109일 한글날에 보물승격을 신청하였다는 얘기를 들어었는데 2007 9월 18 보물 제 1524호 이윤탁한글영비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문화재청의 자료를 옮겨봅니다.
<이 비석은 묵재() 이문건(李文楗)이 부친인 이윤탁(李允濯)의 묘를 모친인 고령(高靈) 신씨(申氏)의 묘와 합장하면서 1536년에 묘 앞에 세운 묘비이다. 이 묘비에는 앞면과 뒷면에 각각 묘주의 이름과 그 일대기가 새겨져 있고, 왼쪽과 오른쪽에도 한글과 한문으로 경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의 특징적 가치는 비석 왼쪽 면에 쓰여진 한글 경고문인데, 우리나라 비문으로서는 한글로 쓰인 최초의 묘비문으로 알려져 있어 그 역사적 가치가 높으며 국어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글영비는 국어생활사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첫째, 중종 31(1536) 당시 한글이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는가를 증명해주는 자료이다. 둘째, ‘한글영비에 새겨진 한글의 서체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의 서체,<훈민정음 해례본>의 서체와 <용비어천가> 서체의 중간형의 성격을 지닌다. 셋째, 이 비석의 글은 비석의 이름인 영비(靈碑)’를 제외하고는 국한 혼용이 아닌 순 국문으로 쓰여 있다. 본격적으로 한글로만 쓴 문헌은 18세기에나 등장하나 이 한글영비16세기에 이미 순국문으로만 쓰인 문장이라 할 수 있다. 넷째, ‘한글영비는 언해문이 아닌 원 국문 문장이다. 15세기 이후 한문 원문을 번역한 언해문이 한글자료의 주종을 이루었으나 이 한글영비는 짧은 문장이긴 하나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인 문장으로, 한글이 한문 번역도구가 아닌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직접 전달하는 도구로 변화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섯째, ‘한글영비에 쓰인 국어 현상은 이 당시의 언어를 잘 반영하여 당시 국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한발물러 세상보기였습니다.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