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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둘러보기

사적 제1호 포석정-경주

200751, 경주의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사적 제1호인 포석정을 찾아봅니다.
나정에서 포석정쪽으로 조금 올라가다가 포석정 입구라는 표지판을 따라 우회전하여 조금 들어가니 바로 주차장이 나오고 입구에서는 주차료 2000원을 징수합니다.
포석정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안내도를 카메라에 담고 입장권을 파는 매표소에 가보니 입장료가 500원입니다. 관람료 500원에 주차료는 2000원이라……
아마도 이 주차장은 남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종일 주차를 하기 때문에 주차료를 비싸게 받는 모양인데, 짧은 시간을 둘러보고 떠나는 포석정 관람객들에게는 별도의 요금을 징수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포석정 입구>
입구에 있는 포석정지(鮑石亭址)라고 표기되어 있는 안내문을 읽어봅니다.
포석정은 신라 왕실의 임금들이 연회를 베풀던 별궁인데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전복처럼 생긴 석조 구조물만 남아 있고,6m의 화강석의 수구(水溝)는 임금과 신하들이 잔을 띄우며 시를 읊었을 것으로 보이고, 927년 신라 경애왕이 이곳에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마친 곳으로 알려져 있답니다.
덧붙여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었으나, 오늘날까지 그 자취가 남아 있는 것은 드문 일로, 당시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라고 되어 있지만 신라왕이 놀다가 나라를 망하게 한 곳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강하게 다가옵니다.
문화재청의 자료를 살펴보니 위의 안내문의 내용에 더하여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 차가 5.9Cm라고 되어 있습니다.

<포석정>
포석정을 살펴보며 사진을 담고 있는데 수학여행온 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각 안내원의 인솔에 따라 포석정 주변에 이곳 저곳에 그룹을 지어 빙 둘러가며 자리를 잡습니다.
이 쪽, 저 쪽으로 방향을 바꿔가며 포석정을 둘러보자니 안내원들이 하나 같이 목에 힘을 주어 강조하는 내용이 내 귀까지 들려 오는데 대부분이 거의 똑 같은 내용입니다.
서기 927년 음력 11월에 견훤이 침공을 하는데도 경애왕이 여기서 술마시고 놀다가 잡혔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라, 음력11월이면 가장 추운 계절인데 누가 밖에서 술을 마시고 놀겠느냐? 그것이 아니고 나라가 위태로워 지자 이 곳에서 神과 조상들에게 나라를 구해 주십사하고 제사를 지내다가 견훤에게 잡힌 것이다. 라고 복창을 시켜가면서 열을 올립니다.
어렸을 때 경애왕이 이곳에서 술마시고 견훤에게 잡혀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배웠지만, 머리가 굵어지면서 이런 저런 글을 접하다 보니 상식적으로 얘기가 되지 않는다고 나름대로 생각 해 왔습니다.


<포석정>
어느 고고학자(조유전)가 쓴 포석정의 침묵이라는 글의 몇 부분을 요약해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애왕이 서기 927년 음력11월에 포석정에서 귀족들과 연회를 열고 즐기다가 견훤에게 잡혔다고 되었는데 과연 음력11월 한겨울에 노천에서 술판을 벌였겠는가?
일제강점기에 입수구와 출수구가 망실된 것을 일본넘들이 다시 짜 맞추어 정비하고 중요문화재, 그것도 사적 제 1호로 지정 보존한 이유는 비운의 역사현장을 보존함으로 적이 쳐들어 오는데도 임금과 신하가 질탕하게 놀다가 망했고, 조선인은 식민지로 살 팔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포석정>
-유상곡수연은 술잔을 물에 띄워놓고 시를 지으며 즐기는 왕과 귀족들의 연회장소를 뜻하기 때문에 삼국유사와 같이 기록을 할 수 있겠지만, 고대 정원 유적으로서의 견해와 종교사적인 측면에서의 검토하고 또한 화랑세기에 기록된 것을 가지고 새롭게 조명해본 견해를 눈여겨 보자.
포석정은 이궁(離宮)의 정원에 설치된 일년동안 몸에 밴 부정을 맑은 물로 씻어 청결하게 하고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하던 시설인데, 음복을 할 때 흥을 돋구기 위해 잔을 물에 띄워 보내는 유상곡수의 형태로 발전한 것으로 오늘날에도 제사 전에 목욕재계하는 풍습으로 남아있다.
또한 화랑세기에는 포석사(鮑石祠) 또는 포사(鮑祠)가 신주를 모시는 사당 또는 묘로 보았으며,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결혼식 올린 곳으로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나아가 귀족들의 혼례를 거행하는 중요한 장소였다.

<포석정>
-다시 정리하면 포석정은 유상곡수연과 유배거시설과 관련이 있고, 또한 유력자들의 길례가 행해진 사당으로 성스런 장소였던 포석사의 정자로 보이며, 이 곳에서 국가 제사 후에 음복을 하고, 길례 뒤에는 피로연을 열었던 장소로 보이며, 경애왕은 질탕하게 놀다가 견훤에게 참변을 당한 것이 아니고 국가의 안위를 위한 제사를 지내다가 참변을 당한것으로 보인다.
대충 이와 같은 요지로 일반적인 경애왕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문헌과 당시의 시대적 환경 그리고 상식적인 측면으로 고찰하여 진실에 접근해 보자는 논지입니다.


<포석정원경>
포석정의 입수구에는 거북모양의 돌조각이 있어 이 거북의 입에서 물이 나왔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어느 지방관리가 집어갔고 그 행적을 알 수 없다고 하네요.
천년의 세월이 넘었지만 장인의 손으로 다듬어진 화강석의 돌갗은 요즘 기계로 가공한 석조물과는 달리 이물감이나 낯설움 없이 항상 곁에 있었던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은방울꽃>
포석정 주변을 둘러봅니다.
산책로를 따라 잘 가꾸어진 화단에는 꽃대에 매달려 있는 은방울꽃이 마악 봉우리를 열고 있고, 옅은 남색꽃에 더듬이 몇 개를 달고 있는 개불알풀이 여기저기 눈에 들어옵니다.


<개불알풀>
포석정의 진실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관광안내원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복창까지 시키며 알려주던 내용에 심정적으로 찬성표를 던지면서 포석정을 나섭니다.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