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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둘러보기

파괴된(?) 경주 나정(사적245호)-경주

2007년 5월 1일,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라는 나정을 찾아 갑니다.
나정입구의 팻말을 보고 좁지만 왕복 2차선인 도로를 따라 가는데 도로가 끝나고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시멘트 포장 길로 들어섰는데도 나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침 어르신 한 분이 밭둑에 계셔서 나정을 물어보니 저 아래 나무숲이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정전경>
나정입구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니 입구에 안내판만 하나 서있을 뿐 넓은 공지만 있고 그 끝에 소나무 몇 그루가 자리를 하고 있고 한편에는 발굴 유물로 보이는 석물이 두어 군데로 나누어 쌓여 있고 비석도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입구에 있는 나정의 안내문을 봅니다.
나정은 사적245호로 지정된 곳으로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이 우물터에서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데 기원전 69년 고허촌장 소벌공이 우물가에 흰말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이상히 여겨 그 자리에 가 보았더니 말은 간 곳이 없고 큰 알만 있었고,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13세 되던 해(기원전 57)6부 촌장들이 그를 임금으로 뽑았으며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이라고 하였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곳에는 지금도 우물이 남아 있으며, 조선 순조 3(1803)에 시조 왕의 내력을 기록한 '유허비'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정에 대해 검색을 해보니 그 중에서 눈에 띄는 내용 몇 꼭지가 눈에 띄어 그 중 하나를 옮겨봅니다.
<중앙문화재연구원은 지난 2002년부터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깃든 경북 경주시 탑동 7001번지 나정[蘿井'사적 245]을 발굴조사한 결과 신라초기 우물과 건물의 흔적인 구상유구(고랑의 유적)등의 유적을 발견했다고 24일 밝혔는데 이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실존 인물이라고 쓴'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뒷받침 하는 유적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이번에 발견된 유적은 직경14 m.너비2m.깊이2m 의 원형 유구와 이 유구 바깥을 두른 목책의 흔적, 그리고 유구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8각 건물지 등이며, 원형 유구에서는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의 흔적으로 보이는 기둥 구멍이 발견되었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대 남해차차웅3[서기6]조에는 "시조의 사당을 세웠다"고 되어 있으며 또한 제21대 소지마립간 9[487]조에는 "나정에 신궁[神宮]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발굴조사 안내 표석?>
유물을 쌓아 놓은 부근의 지면에 경주 나정(사적제245)’라고 제목이 붙어 있는 표석이 눈에 띕니다.
<조사기관:중앙문화재연구원, 조사기간:20025~20059.이곳은 경주시에서 추진한 나정정비사업일환으로 인하여 중앙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한 후 지도위원회의 결과 학술적인 가치가 있는 유물을 제외한 기타 유물을 매몰한 곳입니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발굴한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기타 유물을 매몰했다는 내용만 있는데 위에 검색할 때 '박혁거세의 실체 증거 확인' 등의 내용은 어디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라시조왕탄강정기초명비>
발굴물이 놓여 있는 뒷 부분에 까만 색의 석비가 있어 이것이 안내문에서 언급한 조선 순조 3(1803)에 시조 왕의 내력을 기록한 유허비인가 하고 생각을 했는데 비석의 측면을 보니 얘기가 좀 다릅니다.
측면의 마지막 행에는 新羅紀元後 一千九百八十六年 己巳四月로 되어 있어 57년을 빼면 1929년이 되는데 순조31803년하고는 많이 차이가 나, 위에서 말한 유허비는 아닌모양입니다.
비석의 상부에 있는 글씨를 보니 '신라시조왕탄강정기초명비'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외의 다른 비석이 보이지 않으니 어찌된 것인지……
순조 때 세웠다는 이 '유허비', 혹시 발굴하면서 파손 내지는 없애버린 것은 아닌지?


<발굴 석물?>

까만 석비앞에는 조사하면서 발굴된 것으로 보이는 석물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만 어떤 설명도 없고 그렇다고 보존해 놓은 것도 아니고……그냥 방치해 놓은 수준으로 보입니다.


<사적지 표석 ?: 파손된체 뒹굴고 있음>
그 옆 땅 위에 뒹굴고 있는 표석하나가 눈에 띄어 살펴보니 사적 제245호 경주 나정이라고 새겨진 화강암 표석인데 발굴전에 나정에 세워져 있던 표석으로 보이는데 밑둥이 파손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발굴조사를 하면서 파손시키고 이렇게 방치 한 것이 아닌가 싶고요.

<발굴석물?>
그 위쪽으로는 장대석의 모양으로 된 돌이 한무더기 겹쳐서 쌓여져 있고 그 뒤편에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좀 길죽한 형상의 무엇인가를 쌓아놓고 위에는 천막포로 덮어 놓았습니다.


<나정과 건물이 있던 터?>
그리고 주변을 둘러봐도 나정의 우물과 건물이 보이지 않는데 혹시 이것들도 발굴작업을 하면서 파헤치고 헐어버린 모양입니다.
부지 한가운데 원형으로 불룩하게 솟은 부분이 있는데 혹시 나정터가 아닌지?
이런 저런 모양을 둘러보다 보니 국가 예산을 들여 발굴조사를 했다고 하는데 이건 발굴조사가 아니라 이를 빌미로 기존에 있던 사적물과 시설물을 모두 파과한 것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납니다.

<중앙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현황 표>
경주 나정을 발굴 조사했다는 '중앙문화재연구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경주 나정'에 관한 자료를 살펴봅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중앙문화재연구원의 홈페이지의 발굴조사”Column에는 위의 그림과 같이 20025월부터 2005년11월12까지 네차례의 발굴조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발굴보고서”Column을 검색해보니 아래의 그림과 같이 경주 나정에 대한 발굴보고서는 단 한 건도 등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중앙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보고서: 경주 나정에 대한 발굴조사보고서는 존재하지 않음>
국가예산을 들여서 4차에 걸쳐 발굴을 하였으면 마땅히 발굴보고서가 나와야 하거늘 5(1)에서 2(4)이 지났는데도 발굴보고서 한 건도 나오지 않았다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Internet을 검색을 해보면 발굴조사와 관련된 기사가 중간 중간에 많이 나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언가 구린 냄새가 솔솔 풍깁니다.
또한 이 곳은 많은 어린학생들과 탐방객들이 찾아오는 곳이라는데, 발굴조사를 마쳤으면 당연히 원상복구를 하고 나정의 안내문에는 그간의 발굴경과를 알려야 함에도, 2005년 11월에 발굴조사가 끝났는데도 원상복구를 하지 않고 이렇게 폐허상태로 방치해 두고 있는 것은 아무리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국가 예산으로 중요한 사적지를 발굴조사하면서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하는지 감독관청에서는 마땅히 발굴작업을 실시한 경주시청 공무원과 중앙문화재연구원에 대한 감사를 철저히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엄히 물어야 될 것입니다.
또한 조속히 훼손된 사적지를 복원해야 되겠고요.

<발굴전 경주 '나정'의 모습: 문화재청 자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경주 나정의 모습을 '문화재청'자료에서 빌려와 올려봅니다.
문화재청의 사적245호 경주 나정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지금은 그림자도 남아 있지 않은 위의 그림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오릉(五陵)에서 동남(東南)쪽을 바라보면 1㎞쯤 떨어진 소나무숲 속에 시조유허비(始祖遺墟碑) 옆에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을 나정(蘿井)이라 한다.
이곳은 신라(新羅)의 시조(始祖)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강전설(誕降傳說)이 깃든 곳이다. 신라(新羅)의 건국신화(建國神話)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다 같이 언급되어 있으나 후자(後者)의 것이 더 상세하고 신화적(神話的)인데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한(前漢) 지절원년(地節元年) 임자((壬子) B.C 69) 3, 초하룻날 신라(新羅) 건국(建國)의 주역(主役)들인 육촌(六村)의 촌장(村長)들이 각각(各各) 그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옆의 언덕에 올라 회합을 갖고 육촌(六村)에는 다스릴 군주(君主)가 없어 백성들이 방일(放逸)하여지고 나태하여지니 유덕(有德)한 인물(人物)을 선출하여 군주(君主)로 모시고 도읍(都邑)을 정하자고 결정하였다. 이와같이 결정을 한 후에 그 일행(一行)이 높은 곳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양산(陽山)아래에 있는 나정(蘿井)이라고 하는 우물근처에 이상야릇한 기운(氣運)이 전광(電光)처럼 땅에 드리워져 있었고 백마(白馬)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경배(敬拜)하듯 하고 있었다. 이러한 광경을 바라본 일행(一行)은 모두 나정(蘿井)으로 달려가서 보니 그곳에는 붉은 색의 커다란 알() 하나가 있었는데 백마(白馬)는 사람들을 보자 길게 울부짖으며 하늘에 올라가버렸다. 육촌(六村)의 사람들이 그 알을 쪼개어 보니 의외로 자태가 단정한 어린 사내아이 하나가 있었다. 나정(蘿井)에 모였던 육촌(六村)의 촌장(村長) 이하(以下) 모든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겨 동천(東川)에서 목욕시키니 어린아이의 몸에서 광채(光彩)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어울려 춤 추듯 놀고 천지(天地)가 진동(振動)하고 일원(日月)이 청명(淸明)해졌다.
모든 사람들은 이 어린아이가 세상을 밝게 한다해서 혁거세(赫居世)라 이름하고, 같은 날에 알영정(閼英井)에서 계룡(鷄龍)의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난 계집아이 알영(閼英)과 함께 짝지워 남산서록(南山西麓)에 궁()을 마련하여 놓고 봉양(奉養)하였다. 이성아(二聖兒)의 나이가 13세 되던 해인 오봉원연갑자(五鳳元年甲子)(B.C. 57)에 남아(男兒)를 왕()으로, 여아(女兒)를 왕후(王后)로 삼았으며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로 하였다. 육촌(六村)사람들은 혁거세(赫居世)가 태어난 알이 마치 박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의 성()을 박()으로 하였다.>

kangjine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