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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29호 성덕대왕신종 (070501)

2007년 5월 1일, 진평왕릉과 선덕여왕릉을 찾아가는 길에 경주박물관을 들릅니다.
작년 년말에 경주박물관을 들렀을 때 대충 둘러보고 왔던 성덕대왕신종을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기 위해 박물관을 들렀습니다.


<성덕대왕신종-남쪽>
박물관의 넓은 주차장에 관광버스, 승용차가 꽉 차 있어 차를 대기가 어렵습니다.
겨우 차를 대고 박물관을 들어가니 전국에서 몰려온 초등학생들이 여기저기 몰려 앉아 관람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쪽에서 바라본 성덕대왕신종의 모습입니다.
성덕대왕신종을 신라 35대 경덕왕(742~765)이 선황인 성덕대왕(702~737)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대종을 만들기 시작했으나 실패하고, 그의 아들인 혜공왕(765~780) 7년에(771년)에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성덕대왕신종 명문-남쪽>
성덕대왕신종의 남쪽과 북쪽의 종신 한가운데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위에 있는 명문은 남쪽 종신에 새겨져 있는 명문인데 우측 상부의 명문은 명확히 보이지만 다른 곳은 글씨가 있는 것은 알겠는데 명확히 보이지 않습니다.

<성덕대왕신종 명문-북쪽>
북쪽의 명문은 남쪽보다 더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명문은 1천여자로 그 중의 내용 몇 구절을 안내문에서 읽어봅니다.
지극한 도는 형상의 밖에 있어서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 없으며, 큰 음(大音)은 천지의 사이에 진동하나 들어도 능히 그 울림을 듣지 못하니, 부처님께서 이해의 방편인 가설을 열어 진리의 깊은 이치를 관찰하시고, 신종을 달아 '일승의 원음(진리)'을 깨닫게 하였다고 되어있답니다.
그 외에도 이 종을 만들게 된 배경으로 성덕대왕의 업적과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성덕대왕 마저 떠나자 효자였던 경덕대왕이 성덕대왕을 추모하기 위해 구리 12만근을 들여 종을 주조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내용이 기록 되어 있답니다.
경덕왕의 아들인 혜공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771년 12월에 이종을 만들었는데 보는 사람 모두 그 기이함을 칭송하였으며 이 종소리를 듣는 사람은 복을 받게 될 것이며, 그 신종의 모양은 마치 산과 같이 우뚝하고, 그 소리는 용의 울음과 같았다라고 되어있답니다.



<성덕대왕신종-남동쪽>
처음에 이 종은 성덕대왕의 원찰(願刹)이었던 봉덕사에 두었으나 이 절이 폐사되면서 영묘사, 경주읍성, 동부동 옛 국립경주박물관을 거쳐 1975년 지금의 경주박물관으로 옮겼졌는데 처음에 달았던 곳의 이름을 따서 '봉덕사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 종소리가 종의 주조과정에서 넣었다는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와 같다고 하여 '에밀레종'이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1915년 구 경주박물관으로 종을 옮기는 모습:문화유산답사기에서......>
문화유산답사기에는 이 종이 봉덕사에 봉안되었다가 어느 때인가 북천이 홍수로 넘쳐 봉덕사는 매몰되고 에밀레종만 폐사지에 뒹굴고 있었는데 1460년 경주 부윤이던 '김담'이라는 분이 이것을 영묘사 옆에 매달아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1506년에 당시 부윤 '예춘년'이 경주 남문 밖 봉황대 밑에 종각을 짓고 종을 옮겨와 성문을 열고 닫을 때, 그리고 군사의 징집을 알릴 때 이 종을 쳤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15년 8월에 경주 법원 뒤쪽에 있던 옛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비천상-남동쪽>
종의 남동, 동북, 북서, 서남 쪽, 네 군데에는 비천상이 아주 섬세하게 새겨져 있는데 남동 쪽과 북서 쪽에 있는 비천상은 위의 그림처럼 좌측을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입니다.


<비천상-동북>
동북 쪽과 서남쪽에 있는 비천상은 위쪽의 그림처럼 우측을 향해 앉아 입니다.
비천상은 부처가 설법하는 곳이나 보살이 머무는 곳에 나타나 허공을 날면서 꽃을 뿌리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두손을 모아 공양을 한다고 하는데, 이 신종에 새겨져 있는 비천상은 연꽃방석에 앉아 긴 천의를 너울거리며 보상화 앞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하늘을 날면서 두손을 모아 공양을 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성덕대왕신종-동쪽>
신종의 동쪽과 서쪽에는 종고리인 용머리의 방향과 같은 축으로 둥그런 연꽃무늬의 당좌(撞座)가 종신에 새겨져 있습니다.
종을 칠 때는 반드시 여기를 쳐야지 그렇지 않고 조금만 어그러지거나 비껴가도 제대로 종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연꽃무늬 당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위의 내용과 함께 다음과 같이 이 당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서울공대 이장무 박사의 말을 빌리면, 야구에서 똑같은 투수의 똑같은 구질이라도 야구방망이 어디에 맞느냐에 따라 홈런도 되고 파울 볼도 되는데 바로 이 당좌가 에밀레종의 '홈런을 치는'자리라는 것이다"


<성덕대왕신종-용뉴와 음통>
신종의 상부에 있는 종고리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그 위로 종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이 있어 이 종의 소리에는 다른 종에서 들을 수 없는 장엄한 맥놀이가 생기고 있답니다.
이 음통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라고 합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경주의 구 박물관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 신종을 옮기기 전에 종각을 짖고 종고리를 달았는데 그 때 박물관장이던 소불 정양모 선생이 이 종고리의 부실여부를 확인하고자 포항제철에서 28톤짜리 강괴를 빌려와 종고리에 걸어 놓고 Load Test를 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22ton의 종무게를 견디기 위한 Load Test라면 44Ton의 강괴가 필요한 것을 알고는 소불선생은 틈만 나면 이 28Ton짜리 강괴를 흔들었는데 7일째 되는 날 종고리가 휘어져 벌어졌고 열흘이 되니 곧 떨어질 것 같아 강괴를 내려놓다다고 합니다.

<소불선생이 포철에서 빌려온 28톤 강괴로 Load Test를 하는 모습: 문화유산답사기>
소불선생은 그 종고리를 갖고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올라와 문제를 제기하였고 문화재관리국장, 공영토건 사장, 원자력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장 등이 '에밀레종 종고리 제작위원회'를 조직하여 종고리를 제작하기로 하였답니다.
그런데 이 종을 안전하게 걸려며는 직경 15Cm의 봉강(Round Bar)가 필요한데 종에 뚫려 있는 구멍의 직경은 9Cm도 되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다가, 이의 제작책임을 맡고 있던 '황실장'이라는 사람이 '그 전에 매달았던 쇠막대기가 있습니까?'하고 묻자 소불선생이 창고에서 그 것을 꺼내 보여주었더니 살펴보고는 '이 것이라면 안전합니다.'라고 하여 그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의 옛 조상들이 만들었던 쇠막대기를 현대의 야금학 기술로도 못 만들었다고 하는데, 위 '종뉴와 음통'그림에 보이는 종고리의 맨 아랫쪽에 있는 Round Bar가 바로 그 것입니다.



<성덕대왕신종-종유>
종의 맨 위쪽에는 당초무늬의 띠가 둘러있고 비천상의 위쪽에는 아홉개의 종유(종젖꼭지)가 네 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성덕대왕신종-아래쪽 당초무늬>
종의 아래쪽에도 당초무늬의 띠가 둘러져 있고요.



<박정희 대통령 신종-불국사 범종>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재미있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1970년대 유신시절에 불국사에는 에밀레 종을 모방하여 반쯤 크기가 되는 꽤 큰 범종 하나가 새로 제작하여 걸었는데 이 종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한*그룹 조** 올림"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20세기의 '박정희 신종'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종은 항상 삐닥하게 걸려 있어 마치 6시 5분을 가리키는 시계방향과 같았다고요.
이 종소리가 고르게 퍼져 나가지 못하고 항시 웅웅거리자 불국사의 월산스님이 경주박물관에 왜 그런지 조사를 의뢰하였다고 합니다.
에밀레 종은 어디를 측정하더라도 두께가 위쪽은 10Cm이고 아래쪽은 22Cm인데, 이 종은 같은 면이라고 하더라도 어디는 10Cm, 어디는 5Cm로 균일하지 못하고 기포도 엄청 많이 들어가 어느곳은 하늘이 보일것만 같아다고 합니다.
그러니 삐딱하게 걸리 수 밖에......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2년이 지난 후에 다시 가서 보니 그 명문은 깍이어 없어졌더랍니다.



<성덕대왕신종-1975년 이동모습>
위 그림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실려 있는 사진으로 1975년 현재의 박물관으로 신종을 옮길 때의 모습입니다.
신종을 지금의 박물관으로 옮기자 수 만명의 시민들이 그 뒤를 따라 왔는데 이를 본 박물관장이던 소불 정양모선생이 광목 10필을 사오라고 하여 이를 세줄로 만들어 신종의 뒤에 묶어 놓자 시민들이 이 광목줄을 잡고 종을 따라 오는 장대한 행렬을 연출했다고 합니다.
취재차 왔던 TV기자가 촌지를 주지 않는다고 촬영을 하지 않고 철수하여 신종의 이동 모습이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고 유홍준 교수가 '문화유산 답사기'에 썼는데, 이를 본 경주에 사는 손용득씨가 찍어 놓았던 위의 사진을 보내주어 다음 판 부터 이 사진을 책에 올렸다고 합니다.

<성덕대왕신종-종을 치는 나무봉은 어디로......>
언제부터인가 성덕대왕신종은 종소리를 울리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박물관에 가보니 매 시 마다 녹음해 놓은 종소리를 흘려 보내주고 있었습니다.
유홍준교수는 에밀레 종은 예나 다름없이 금이 가거나 깨질 기미가 전혀 없는데도 1200년이나 변함없이 울려왔던 종소리가 그치게 된 이유에 대해 상당히 높은 톤으로 '명작들의 공동묘지'에 에밀레종이 안치되었다는 표현을 하였습니다만, 에밀레 종에는 위의 그림과 같이 종을 치는 나무봉은 보이지 않고 나무봉을 걸어 놓았던 쇠줄만 서로 얽메여 묶여 있었습니다.
아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오는 사진에는 나무봉이 균형있게 매달려 있었는데......



<성덕대왕신종:나무봉이 매달려 있음>
박물관 매장에 에밀레종 소리를 녹음 해놓은 것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카세트 테잎뿐이라고 합니다.
하는데 요즘에는 카세트 플레이어가 흔치 않아 들어보기도 어려운데......
옛날에 경주박물관에 와서 사다놓은 테잎이 집안 어디엔가 있을 테지만 찾아지지가 않습니다.
에밀레 종을 뒤로 하고 진평왕릉을 찾아 박물관을 나섭니다.


성덕대왕신종의 종소리를 들어봅니다. (츨처:http://blog.daum.net/romances)

kangjinee......^8^